업무개시명령이 ‘전가의 보도’?…내용·절차 모호 ‘사실상 사문화’

장현은 2022. 11. 27.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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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물연대 파업]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가 총파업을 시작한 24일 오전 경기 의왕 내륙컨테이너기지(ICD) 제1터미널 앞에서 열린 화물연대 서울경기지역본부 총파업 출정식에 참석한 조합원들이 안전운임제 확대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정부가 안전운임제 확대 적용 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선 화물연대를 압박하기 위해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회의 등 사상 최초로 업무개시명령을 발동하기 위한 논의 절차에 들어갔다. 하지만 특수고용노동자인 화물기사 등에 대한 업무개시명령은 내용과 절차가 모두 모호해 사문화 돼있을 정도로 실효성을 발휘하기 힘들다는 지적이 나온다.

업무개시명령이란?

27일 대통령실이 민주노총 공공운수서비스노조 화물연대본부(화물연대) 파업 관련 중대본 회의를 28일 가동하겠다고 밝힌 건 업무개시명령과 연관된 것으로 파악된다.

업무개시명령은 2004년 화물자동차운수사업법 개정 때 도입됐는데, 국토교통부의 ‘육상운송화물분야 위기대응 실무매뉴얼’엔 중대본에서 업무개시명령 발동 등을 논의할 수 있고, 국무회의에서는 이를 심의해 발동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28일 화물연대와 정부의 첫 협상이 결렬되면, 이르면 29일 국무회의에서 업무개시명령이 심의·결정될 수 있는 것이다.

국토부장관은 운송사업자나 운수종사자가 정당한 사유 없이 집단으로 화물운송을 거부하여 화물운송에 커다란 지장을 주어 국가경제에 매우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거나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으면 업무개시를 명할 수 있다. ‘정당한 사유’ 없이 위반하면 3년 이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도 있다.

‘정당한 사유’란 무엇인가?

업무개시명령은 불응 때 형사처벌을 받는데도 구성요건이 불명확해 헌법상 죄형법정주의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당한 사유 없이’ ‘집단으로’ 등 요건부터가 불분명하다. 가령 안전운임제 도입을 사유로 한 운송거부를 ‘정당한 사유’로 볼 수 있을지, 유류비 증가 등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개인적 사유로 운송을 중단한 화물기사를 ‘집단으로’ 운송을 거부한 기사와 어떻게 구분할지 등이 관건이 될 전망이다.

한국이 비준한 국제노동기구(ILO)) 협약이 금지하는 강제노동을 강요하고,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조연민 공공운수노조법률원 변호사는 “국민경제가 위태롭다는 이유로 화물 노동자한테 일을 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국민 상식에서도 굉장히 위험한 일”이라며 “자신의 직업 수행에 관한 자유는 모든 국민의 기본권인데 이는 기본권에 전면 배치되는 강제 조항”이라고 짚었다.

어떻게 송달(전달)할 것인가?

절차적인 문제도 만만찮아 명령이 실효성 있게 집행될지도 의문이다. 관련 법령엔 업무개시명령의 절차에 관해 따로 규정돼 있지 않다. 이 경우 행정절차법을 따라야 하는데, 법 제14조는 적법한 송달을 위해서는 주소지로 명령서를 보내야 하고, 당사자가 송달 받아야 명령서의 효력이 발생한다고 본다. 전국에 흩어져 있고 고정된 출퇴근 장소가 없는 개별 화물 노동자한테 업무개시명령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화물연대 노동자가 명령서를 ‘안 받으면 그만’인 것이다.

국토부 관계자는 27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전달 대상과 방식 등에 대해서는 1차적으로 검토를 마쳤고 추가로 보완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2000년 의약분업 당시 정부는 의협 간부들한테 업무개시명령서를 일반우편으로 병원에 보내 부착하거나 등기우편으로 보냈다. 2005년 ‘명령서를 병원에 부착한 것 만으로는 적법한 교부송달이 아니며, 반송된 등기우편은 송달 효력이 없다’며 의료법 위반 유죄 부분을 파기환송한 바 있다.

14일 뒤에나 효력 발생?

정부가 관보나 운송사 게시판 공고 등으로 공시송달을 할 수도 있지만, 이 경우 공고일에서 14일이 지난 때에야 그 효력이 발생한다. 총파업이 얼마나 진행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사실상 의미 없는 절차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조 변호사는 “정부가 지금까지 업무개시명령을 실제로 발동하지 않고 압박용 카드로만 검토한 배경에는 위헌 소지 외에 실무상 문제가 컸을 것”이라며 “행정절차법상 적법한 송달이 이뤄지려면 상당한 시간과 노력, 비용이 소모될 수밖에 없다. 국민경제가 엄청난 위기라면서 업무개시명령을 하겠다는데, 오히려 심각한 행정력 낭비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장현은 기자 mi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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