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비·바람이 완성한 비엔날레 작품들
미술관밖 야외에 작품 대거 설치
제주현대미술관 등 실내 외에
가파도 등 자연에 전시관 마련
"작품의 마지막 완성은 자연"
신예선 작가, 고목나무에 명주실
나무가 수백년 바라본 역사 표현
伊 갈리오토, 가파도 버려진 집
프레스코화 통해 생명력 그려내
세련된 외관의 미술관, 그 안의 하얀 벽면을 가득 채운 그림과 조각품들…. 2년마다 열리는 미술축제인 ‘비엔날레’의 이미지는 대개 이렇다. 개최국이 어디든, 언제 열리든, 미술 애호가들은 비엔날레란 단어를 들으면 ‘화이트 큐브’로 불리는 실내 전시회를 떠올린다. 짧아도 2개월, 길면 7~8개월씩 열리는 비엔날레의 특성상 야외에 전시하면 비와 바람에 작품이 훼손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지난 16일 개막한 제주비엔날레는 이런 상식을 깼다. 제주도립미술관, 제주현대미술관뿐 아니라 가파도, 삼성혈(三姓穴) 등 제주 곳곳에 위성전시관을 두고 ‘자연과 예술이 함께 호흡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전시해서다. 제주의 비바람으로부터 작품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노출함으로써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역발상이다. 올해 비엔날레의 주제는 ‘움직이는 달, 다가서는 땅’. 예술을 통해 흐르는 자연의 시간을 담고, 인간과 자연의 간극을 좁히겠다는 의미를 담았다.
날씨 따라 변하는 작품
이번 제주비엔날레는 2017년 1회 개최 후 5년 만에 열렸다. 이름대로 2년마다 열어야 했지만, 부실 운영 논란과 내부 갈등, 여기에 코로나19까지 겹치면서 존폐 위기에 몰렸다. 그래서 미술계는 올해 비엔날레에 주목했다. 전시가 별 볼 일 없으면, 다음 제주비엔날레는 열리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번 비엔날레의 작품성과 흥행성이 떨어지면 곧바로 ‘인공호흡기’가 떼어질 수 있다는 의미였다. 박남희 예술감독은 그 해법을 ‘자연과의 공생’에서 찾았다. 제주에서 만난 박 감독은 “인간이 아니라 자연의 시각으로 본 제주의 신화, 문화, 역사를 이번 비엔날레에 담으려 했다”고 말했다.
작품성에 대한 미술계 안팎의 평가는 긍정적이다. 현지인을 중심으로 입소문도 나고 있다. 박 감독의 말대로 16개국 55명의 작가가 출품한 165점의 작품은 자연 속에 스며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제주 세 성씨(고·양·부) 시조의 탄생 신화가 담긴 삼성혈에 설치한 신예선 작가(49)의 ‘고치를 짓다’(2020)가 대표적이다. 그는 600~700년 된 고목들에 1.5㎜ 두께의 명주실을 한올한올 붙였다. 조선시대부터 수백 년간 삼성혈을 지켜온 나무들의 역사를 명주실을 통해 ‘시간의 벽’으로 표현한 것이다. 명주실은 햇빛이 쨍쨍할 땐 팽팽해지고, 비가 오면 늘어지는 등 날씨에 따라 달라진다. 나무들이 만드는 그림자가 실에 드리우면서 다양한 빛깔을 펼쳐내기도 한다. 박 감독은 “자연 속에서 작품이 살아 숨 쉬는 것”이라고 했다.
섬 전체를 전시장으로
모슬포항에서 15분 배를 타고 가면 있는 가파도는 섬 전체가 전시장이 됐다. 영국 작가 앤디 휴즈(56)는 가파도 해변에 버려진 플라스틱 병을 동그랗고 반투명한 아크릴 판에 프린트한 뒤 바닷가 근처 정자에 걸어놨다. 작품의 제목은 ‘씨 스루(SEE-THROUGH’(2022). 관람객들이 플라스틱 쓰레기를 통해 가파도 바다를 바라보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인 것처럼 인간이 만든 쓰레기도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그만의 역발상을 작품에 담았다.
이탈리아 작가 아그네스 갈리오토(26)는 자신이 찾아낸 가파도 폐가에 5점의 프레스코 벽화를 그렸다. 가파도 곳곳에 버려진 집을 화산 폭발 후 천년 넘게 묻혀 있다가 발굴된 폼페이의 집에 비유했다. 이렇게 야외에 설치돼 자연과 호흡하는 작품은 총 165점 가운데 10여 점이다.
본 전시가 열리고 있는 제주도립미술관과 제주현대미술관도 ‘자연’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 가득 차 있다. 제주에 약 30년간 살고 있는 강요배 작가(70)는 높이 6m가 넘는 캔버스에 폭포를 그려 넣어 자연의 장엄함을 나타냈다. 세계적인 미디어 아티스트 강이연 작가(40)는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를 빛으로 시각화해 환경오염에 대한 문제의식을 일깨우는 작품을 선보였다.
세계 각국에서 온 작가들이 비엔날레를 준비하며 머물렀던 공간도 작품이 됐다. 제주현대미술관 근처에 있는 전시관인 ‘미술관 옆집 제주’엔 태국 작가 리크릿 티라바닛(61)이 약 1주일간 머물며 만든 퇴비가 있다. 죽은 유기물이 쌓이면서 내뿜는 열이 마치 생명과 죽음이 뒤섞인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에서 착안했다. 티라바닛은 제주에 머물며 간 음식점, 만난 사람들도 벽에 적었다. 관람객들이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 자신이 느꼈던 제주를 그대로 느끼게 하려는 취지다. 비엔날레는 내년 2월 12일까지.
제주=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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