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시평] 금반언(禁反言)의 원칙

2022. 11. 27.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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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자신이 주장했던 것과
상반된 주장 막는 법의 원칙
내로남불 횡행하는 정치권선
이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유권자 표로 심판할 수밖에

◆ 매경시평 ◆

농사를 짓던 청년이 6·25전쟁에 참전하였다가 실종됐다. 청년의 아버지는 아들이 가지고 있던 농지를 아들의 대리인 자격으로 팔고 그 대금을 생활비로 썼다. 그 뒤 오랜 세월이 지나 농지의 가격이 크게 올랐다. 청년의 아버지는 아들을 대리할 권한 없이 농지를 팔았으니 매매계약이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매수인을 상대로 농지를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아버지라도 아들의 물건을 권한 없이 처분하면 민법상 무효지만 이런 경우까지 무효라고 한다면 부당하다. 대법원도 청년의 아버지가 자진해서 매매계약을 체결하였으면서 나중에 권한 없이 아들의 물건을 처분했다는 이유로 그 계약이 무효라고 주장하는 것은 금반언의 원칙에 어긋나 허용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

금반언의 원칙은 영미법에서 발전한 법원칙이다. 영미에서는 소송 중에 당사자가 과거에 자신이 주장하였던 것과 상반되는 내용의 주장을 하면 법원이 그 주장을 중단(estop)시켰다. 이런 관행이 발전하여 누구든지 특정한 의사표시를 하여 상대방이 어떤 법률행위를 하게 한 다음 나중에 그 의사표시와 반대되는 주장을 하면 안 된다는 금반언의 원칙(estoppel)이 확립되었다. 금반언의 원칙은 대부분 나라가 국내법의 원칙으로 받아들였고 국제법에서도 널리 통용되는 기본 원칙이 되었다.

우리 민법은 금반언의 원칙을 명문으로 규정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민법 제2조는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는 신의성실의 원칙을 규정하고 있다. 대법원은 이 규정을 근거로 금반언의 원칙이 모든 법률행위에 적용되는 기본 원칙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렇게 중요한 법원칙이 우리 정치권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금반언의 원칙보다 '내로남불'의 원칙이 활발하게 적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내로남불은 금반언과 정반대다. 같은 사안을 놓고 내가 하면 정당하고 상대편이 하면 부당하다고 하는 것이 내로남불이다.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주장이다. 내로남불을 탓할 때 그 주장을 분석하면 상대방의 실책을 공격할 때 한 말이 합리적인 경우가 많다. 상대방이 잘못이나 실수를 저지르면 높은 도덕의 잣대로 엄중하게 비난하기 때문에 옳은 말을 하게 된다. 하지만 자기가 비슷한 잘못이나 실수를 저지르면 상대방의 비난을 엉뚱한 이유로 공격하고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다. 금반언의 원칙과 정반대되는 허용될 수 없는 태도다.

현명한 우리 국민은 여러 차례에 걸친 정권 교체를 통해 우리 민주주의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하지만 정치권의 내로남불은 선진국에 이르지 못한 우리 정치의 속살을 그대로 보여준다. 정치의 영역에도 금반언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정치인이 특정 사안에 관하여 공개적으로 의견을 밝혔으면 합리적 이유가 없는 한 같은 사안에 관하여 그 의견과 다른 말을 할 수 없도록 하여야 한다. 헌법상 표현의 자유가 있어 정치인의 발언 내용을 법률로 제한할 수는 없다. 유권자가 표로 심판해야 한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정치인, 거짓말하는 정치인은 공적 영역에 남을 수 없게 해야 한다.

야당 시절 강력하게 반대하던 정책을 여당이 되면 아무렇지 않게 그대로 시행하고, 여당 시절 시행하던 정책을 야당이 되면 폐지하라고 주장하면서 정치적 공격 도구로 삼는 악습도 사라져야 한다. 야당으로 주장한 정책을 여당이 되어 바꿀 수 없도록 하고, 여당으로 시행한 정책을 야당이 되어 반대할 수 없도록 한다면 우리 정치도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입법, 행정, 사법을 담당하는 국가의 모든 기관이 금반언의 원칙을 포함한 기본 원칙에 따라 법을 만들고 집행하고 재판하는 나라가 법치국가다. 법치국가가 될 때 비로소 우리도 진정한 선진국이 될 수 있다.

[강일원 변호사·전 헌법재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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