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과 허구의 교차 속에 되살아난 어린 날의 향수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2022. 11. 27.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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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감민경의 무경계
원양어선 타고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며
밤이고 낮이고 항상 전등을 밝혔던 어촌
기억인지 허구인지 쉽게 가늠할 수 없는
각기 다른 모습이 모여 낯선 장면을 만들어
선 하나도 허투루 않는 탄탄한 작업능력
재료와 소재의 경계 자유로이 넘나들며 표현

#감민경을 발견하는 일

인연은 어떻게 시작하는 걸까? 언젠가 좋아했던 드라마에서 인연은 빨간 실이 맺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드라마 대사에 따르면 어느 사람이나 그 사람의 새끼발가락에는 보이지 않는 빨간 실이 매여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인연을 만나게 되는 때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 인연의 빨간 실을 잡고 서로 만나게 된다. 미술을 하는 사람으로 살면서 좋은 점은 새로운 인연을 맞이할 기회가 자주 주어진다는 것이다. 사람뿐 아니라 그림에서도 인연을 느끼기 때문인데 좋은 작품을 새롭게 만날 때의 기쁨은 감동의 크기다.
‘0시의 땅’(2022) 2022 부산비엔날레 ‘물결 위의 우리’ 설치 장면.
비엔날레의 계절인 가을을 보내며 부산비엔날레, 제주비엔날레를 방문한 기억을 떠올리니 거기서 빨간 실을 매고 만난 것 같은 작품이 생각났다. 부산비엔날레 본전시장인 부산현대미술관에서 본 감민경(1970, 부산)의 작품이었다. 감민경은 자기 개인의 서사와 주변에 대한 관심을 회화 또는 드로잉으로 그려내는 작가다. 그의 그림은 현실을 기반으로 삼지만 신비로운 꿈처럼 드러나 문학에서의 환상적 리얼리즘을 시각화해낸 것 같다. ‘0시의 땅’ ‘지붕 없는 기억’ ‘잃어버린 밤’ ‘혹시, 푸른 꽃이였나요?’ 등 실제로 그의 작품 제목에서는 문학적 면모가 드러나기도 한다.

작가는 1970년 부산에서 태어났으며 삶의 대부분을 부산에서 보냈다. 2016년 후쿠오카의 한 레지던시 참여를 기점으로 다른 나라와 도시를 오가며 작업을 하게 되었다. 베를린, 제주도 등 다양한 장소에 머물렀으며 최근에는 광주에 작업실을 두고 있다. 그는 더 소소를 비롯해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갤러리조선, 퀸스틀러하우스 베타니엔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2022 부산비엔날레, 부산시립미술관, 화이트블럭, 오픈스페이스 배 등에서 개최한 단체전에 참여했다. 제15회 부산청년미술상, 제5회 하정웅 청년작가전 등에서 수상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부산시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부산문화재단 등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감민경은 군사 독재에 대항하는 시위 움직임이 남아 있던 시절 대학을 다녔다. 선배들은 시위 현장에 참여하기 위해 걸개그림을 그렸고 소집단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제3작업실’ ‘강패’ ‘부산사람’ 등 다양한 동인에 의해 부산 미술계에는 다채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그는 의미가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그것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작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작가의 의미 있는 작업을 하려는 시도는 자기 주변을 둘러보고 형상적으로 그리게 했다. 당시 작업실이 있던 당감동은 주택 재개발 사업을 앞두고 낯선 장면을 보였다. 삶의 터전이었던 건물은 허물어지거나 남아 있고 나무 사이로 드러나거나 감추어졌다. 그는 눈, 사진 그리고 드로잉으로 그 장면을 모으고 파노라마로 그려 하나의 장면 또는 분위기로 잡아냈다. 풍경을 재조합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지우는 행위를 반복하여 존재했던 흔적을 장면 안에 남겨두기도 했다. 서로 다른 시선이 교차하는 화면 위에서 이미지는 서로 병치하거나 어우러져 해석의 가능성을 열었다.

감민경은 풍경에 집중하는 시간을 한동안 보냈는데 레지던시 참여차 후쿠오카로 떠나며 작업에 변화가 생겼다. 해외로의 작품 운반, 보관 공간 등의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종이와 목탄으로 그림의 재료를 바꾸게 된 것이다. 참여한 레지던시 근처 마을 주민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림 속 현실의 범위를 공간, 장소로부터 사람과 삶으로 확장하기도 했다. 과거 번성하던 시기가 돌아오기를 꿈꾸고 기다리는 마을 사람들을 담은 ‘혹시, 푸른 꽃이였나요’(2016)를 일본 화지 위에 그렸다. 독일 낭만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노발리스의 ‘푸른 꽃’ 속 이상향을 찾아가는 모습을 그들에게서 본 것이다.

종이에 목탄으로 그리는 시도는 이듬해 베를린에서도 레지던시에 머무르며 이어졌다. 짐을 싸고 푸는 유목민적 생활에 처해 시작한 목탄 드로잉이었지만 손으로 그리고 문지르며 손맛의 매력을 느꼈다. 그가 베를린에서 목탄 드로잉으로 그린 소재는 주말마다 열리는 플리마켓으로부터 왔다. 오래되고 신기한 물건이 가득한 플리마켓에서 작가의 관심을 끈 것은 사적인 물건들이었다. 개인의 사생활이 담긴 사진, 편지 등이 판매되는 것이 새로웠고 작업에 활용할 생각으로 편지 한 뭉치를 사서 돌아왔다. 엄청난 이야기가 담겼을 것이라고 기대하며 번역을 기다렸는데 막상 읽어보니 그렇지 않았다. 작품을 만들기에는 미완의 자료처럼 느껴졌는데 어쩌면 삶의 모습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불분명한 출처의 기억에서 비롯한 장면을 모아 ‘지붕 없는 기억’(2017)을 그려 미완의 인생을 표현했다.
‘0시의 땅’ 세부. 필자 제공
#기억과 신체의 경계 무너뜨리기

감민경의 작품에는 경계가 없다. 그는 캔버스와 종이, 유화 물감과 목탄 등 재료의 경계를 넘나든다. 장소와 공간, 사람과 이야기, 신체와 분위기 등 내용의 경계도 오가며 그린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탄탄한 작업 능력이 그를 경계로부터 자유롭게 한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작품 앞에 서면 그어진 선만을 보고도 ‘잘 그린다!’는 본능적이고도 직감적인 감탄사가 나온다. 상황에 따라 언젠가 다시 작업 매체와 형태가 바뀔 수 있다는 작가의 말에도 그의 작업에 관한 믿음은 어디 가지 않는다. 이러한 그림 실력을 바탕으로 최근 작가가 진행한 작업은 기억과 신체를 검은색 목탄으로 그려낸 것이 많다. 그 가운데 ‘0시의 땅’(2022)은 올해 부산비엔날레에서 선보여 관람객의 시선을 한몸에 받은 작품이다.

여기 9m에 달하는 대형 화면 위에 장면이 흩뿌려져 있다. 왼편 상단에는 위태로이 전구들이 흔들리고 그 아래 장면을 비춘다. 작은 집이 촘촘히 모여 쌓인 듯한 언덕과 펼쳐진 파밭, 그 사이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남자의 뒷모습. 남자의 오른쪽에는 뜬눈으로 베개를 베고 누워 어딘가를 응시하는 여성이 있고 아이들은 개의치 않은 채 들배지기 놀이를 한다. 화면 오른편 하단에는 언덕 위 집처럼 보이는 집 옆으로 개천이 흐른다. 개천의 물이 쏟아지는 듯한 하수도와 머리에 꽃을 꽂은 채 앉은 여성, 각기 다른 장면은 모여 낯선 장면의 풍경을 만들어 낸다. 낯선 풍경은 묘한 분위기를 형성해 잠자는 동안 깨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보고 듣는 꿈의 순간으로 보는 이를 이끈다.

이 작품은 작가가 어린 시절 경험한 삶의 풍경과 사람을 담은 그림이다. 부산에서 자란 그와 주변에는 아버지가 원양 어선을 타고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1년 또는 2년을 기다리면 어느 날 집에 돌아오셨고 그날을 기다리며 집 전구는 항상 켜져 있었다. 밤에도 새벽에도 항상 불이 들어온 집은 낮과 밤의 경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0시의 땅이었다.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마다 가져오는 신기한 물건과 듣는 놀라운 이야기는 그 땅에 심겼다. 그리고 작가의 그림 속에서 피어올라 밤이기도 낮이기도, 낮이기도 밤이기도 한 장면으로 탄생했다. 시절을 향한 향수는 사실과 허구를 교차하는 낭만적 성향의 장면으로 이렇게 그려졌다.

감민경은 그리는 현실을 장소, 공간에서 사람, 삶으로 확장한 맥락에서 신체에 주목하는 작업도 한다. 삶의 피로가 드러나는 현실 속에서 변이하는 사람의 신체를 보고 극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 화면을 바라보고 타이핑하는 생활은 사람의 등을 굽히고 목도 늘어나게 했다. 더 나은 현실을 향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변형으로 돌아오는 슬픈 결말을 맞고 있는 셈이다. 작가는 최근 이러한 작업을 모아 더 소소에서 다수 선보이기도 했는데 ‘나의 지구’(2022)는 그 가운데 한 점이다.

여기에는 움푹 파인 땅 같은 표면이 있다. 수풀처럼 셀 수 없이 많은 목탄 선이 가득 찬 표면. 하지만 땅이라고 하기에는 땅보다 익숙하고 가만히 보면 거기에는 늘어진 가슴이 있다. 신체는 확대되고 낯설어진 채 가슴 아래 접힌 배의 피부와 함께 나의 지구인 몸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2016년 이후 종이에 목탄 드로잉을 지속하는 작가는 여기서 처음 장지를 작업의 바탕으로 삼았다. 거칠고 질긴 장지는 상대적으로 매끄럽고 연한 켄트지와 달리 목탄이 그 위에서 잘 미끄러지지 않는다. 지우개로 흔적을 지울 수도 없어 한참을 그리고 문지르다 보면 보푸라기가 일어난다. 검은색의 강약이 만든 모노톤의 피부 표면은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무엇이 되어 보는 이에게 다가온다.

김한들 미술이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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