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죽음은 ‘반송’할 수 없는 슬픔이죠”[박주연의 메타뷰]

박주연 기자 2022. 11. 27.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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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50년 맞아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 내놓은 정호승 시인
올대 등단 50년을 맞아 신작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창비)를 출간한 정호승 시인이 지난 16일 서울 중구 천주교성프란치스코회수도원교육회관 앞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이날 그는 자기 시와 인생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 김창길 기자

[주간경향] ‘봄길’, ‘고래를 위하여’, ‘슬픔이 기쁨에게’ 등 그의 시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여러 편이 수록돼 있다. 고 김광석의 ‘부치지 않은 편지’, 고 이동원의 ‘이별노래’, 양희은의 ‘수선화에게’ 등 노랫말이 된 시도 70편이 넘는다. 그만큼 그의 서정시는 탄탄하면서도 읽는 이의 가슴을 흠뻑 적신다. 올해로 등단 50년을 맞은 정호승 시인(72) 얘기다.

그는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1979년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를 시작으로 모두 14권의 시집을 펴냈다. 14번째 시집은 올해 9월 발표한 <슬픔이 택배로 왔다>다. 사랑과 슬픔, 죽음에 대한 깊은 사유와 성찰을 담은 시집이다.

지난 11월 16일 정호승 시인을 만났다. 흰 머리카락을 말끔하게 정돈하고,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나타난 시인은 시종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시와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시도 모든 예술도 비극에서 꽃피어
18년 함께하며 부모님 보내드린 뒤
죽으면 사랑으로 남겨지는 것 깨달아

-등단 50년을 맞은 소회가 어떻습니까.

“50년간 시인으로서 살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죠. 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시를 통해 찾을 수 있으니까요.”

-신작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 표제는 이 시집에 실린 ‘택배’라는 시의 첫 문장이에요. 어떤 함의를 담았나요.

“우리가 택배문화 속에서 살잖아요. 택배 안내 문자를 받으면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죠. 그런데 살아가면서 행복한 소식만 듣는 게 아니잖아요. 그걸 저는 택배로 은유한 거예요. 정말 받고 싶지 않은 택배는 이별이고, 특히 죽음이라는 이별이에요. 제 경우에는 부모님의 죽음이라는 슬픈 택배를 받았어요. 그 택배는 반송할 수도 없어요. 언젠가는 제 죽음이라는 택배를 받게 될 거고요.”

-그러고보면 정 시인은 1979년 출간한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속 시들을 시작으로 슬픔을 담은 시문을 많이 지었어요. ‘슬픔의 시인’으로도 불렸을 정도로요. 시인의 기저에 무엇이 슬픔을 끊임없이 길어올리는 건가요.

“저는 인간의 존재와 그 삶이 비극적이라고 생각해요. 개인의 삶에서도, 사회적 삶에서도, 시대의 삶에서도 원하지 않는 비극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니까요. 그래서 모든 예술은 비극에서 꽃피는 거예요. 인간 삶이 비극이 아니었다면 예술은 꽃필 수 없었을지 몰라요. 제 시의 발원을 묻는다면 인간 삶의 비극에서 시를 자연스럽게 발견하게 된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새 시집에는 ‘구급차 운전사가 바라본 새벽녘’, ‘부르심’, ‘수의’ 등 죽음에 대한 성찰을 담은 시가 많아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부모님을 비롯해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많이 겪고 있으니까요. 사회적 죽음도 많고요. 제가 직장생활을 하던 ‘샘터’에서 상사와 부하로 만난 인연으로 형제지간처럼 아주 가깝게 지낸 정채봉씨(동화작가·수필가·시인)가 2001년 1월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어느 날 지하철을 탔는데 그가 너무 보고 싶은 거예요. 하지만 세상에 없으니 볼 수 없잖아요. 그러고나서 제 주변을 보니 늙으신 부모님이 계셨어요. 그 길로 부모님 댁의 방 하나를 작업실로 만들어 그곳으로 매일 출퇴근했어요. 아버지는 2013년, 어머니는 2019년에 돌아가셨으니까 18년간 그렇게 살았어요.”

-정말 효자였군요.

“그렇다고 해서 자식으로서 도리를 다한 것은 아니에요. 같이 식사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아버지와 목욕도 다녔지만, 부모님께 내 마음을 다 바치지 못했고, 제 인생의 시간을 많이 나눠드리지 못했어요. 부모님에게는 인생의 마지막 시기였잖아요. 그런데 죽음을 기다리는 그분들의 외로움, 존재로서의 고독함, 그런 것을 제가 나누는 데 어려움이 있었어요.”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나요.

“인생의 완성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언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찾아올지 모를 뿐. 부모님이 마지막으로 가르치는 게 있어요. 바로 당신의 죽음이에요. 그것을 통해 인간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알려주고 떠나시는 거예요. 죽어가는 섬세한 과정과 누구나 종생(終生)을 맞이할 수밖에 없음을 무언으로 가르치시는 거죠. 저는 부모님의 유해를 화장해 공동묘지에 조그만 표지석 하나 세워 묻어드렸어요. 한 달 만에 분해되는 친환경 유골함을 사용했기에 완전히 흙이 돼 어디 계시는지 몰라요. 결국 인간은 생명의 원천인 흙으로 돌아간다는 배움을 얻었어요. 가르침은 또 있어요.”

-뭔가요.

“부모님의 육체는 소멸했지만 그분들이 제게 주셨던 사랑, 부모님에 대한 제 사랑은 제 가슴 속에 살아 있다는 점이에요. 인간은 결국 사랑을 남기는 거예요.”

-정 시인의 시는 종교적 색채가 짙어요. 가톨릭 신자이지요. 모태신앙입니까.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종교적이다’라는 말도 있어요. 생명이 탄생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힘이 아닌 것 같으니까요. 제가 태어나서 어머니가 유아세례를 해줬다고 하시니, 모태신앙은 맞아요. 개신교 신자였죠. 가톨릭 신자가 된 것은 서른 넘어 정채봉씨와 함께 성당에서 영세를 받으면서예요. 계기는 대학 졸업을 앞둔 1975년 졸업시험 대신 제출할 논문 형식의 리포터 작성을 위해 읽은 3권짜리 <한국천주교회사>였어요. 천주교회사에 나타난 형벌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큰 감동을 받았거든요.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를 선택한 선교사들의 모습에 전율했어요.”

청소년기에 가난을 뼈저리게 경험한 정호승 시인은 “인간 삶이 비극이 아니었다면 예술은 꽃필 수 없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제 시의 발원을 묻는다면 인간 삶의 비극에서 시를 자연스럽게 발견하게 된다고 말씀드릴 수 있다”고 했다.

가난이 주는 슬픔 속에 시를 발견
어머니도 틈틈이 시를 쓰셨는데
“슬플 때 쓰는 거야” 똑같은 깨달음

정 시인은 1950년 경남 하동군에서 2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대구로 이사했다. 큰외삼촌이 그곳에서 사과과수원을 했다. 정 시인의 가족은 그곳에 기와집을 짓고 살았다. 집 주변은 온통 논밭이었다. 인근에는 범어천이 흘렀다. 소년 정호승은 친구들과 범어천에서 헤엄을 치고 미역을 감고 물고기를 잡았다. 개천이 꽁꽁 어는 겨울에는 썰매를 탔다. 시련이 닥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다. 은행원이던 아버지가 직장을 그만두고 시작한 사업이 연거푸 망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수학여행은커녕 졸업앨범을 살 돈도 없어 포기해야 했다. 장학금을 받고 경북대 의대에 입학한 형은 입주과외를 하며 스스로 학비를 마련했다. 누나는 1960년대 말 파독(派獨) 간호사가 됐다.

-가난을 뼈저리게 경험했군요.

“매일 집으로 일수를 받으러 온 영감님의 모습이 지금도 뚜렷해요. 어머니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안절부절못하셨어요. 다음에 주겠다고 해도 영감님은 안 가고 버텼어요. 고3 때까지 그런 모습을 지켜봐야 했어요. 제가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때 시인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시인은 가난하다는 통념이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시인이 되더라도 기본적인 생활능력은 가져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고생하는 어머니를 지켜보는 일이 힘들었겠어요.

“어머니도 시를 쓰셨어요. 고1 때 어머니가 가계부에 연필로 써놓은 시들을 우연히 읽었거든요. 힘드실 때마다 남몰래 틈틈이 쓰신 것 같았어요. 돌아가시기 얼마 전, 병석에 누워계신 어머니께 ‘예전에 쓰신 시 중 외우시는 거 있으면 말씀해보세요’라고 하니까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시는 슬플 때 쓰는 것이다’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어머니는 시의 비밀을 알고 계셨던 거예요.”

-사춘기 때 겪은 가난이 시인의 창작활동에 어떤 영향을 끼쳤습니까.

“시는 자기의 삶 속에 있는 건데, 그것이 확대되면 우리의 삶이고 공동체의 삶이잖아요. 저는 가난이 주는 슬픔과 어머니의 고통, 이런 것들 속에서 시를 발견했어요. 한송이 꽃을 봐도 ‘저 꽃이 아름답지만 좀 슬프다’ 하는 시각이 생긴 거죠.”

-문학에 대한 재능이 있음을 처음 자각한 건 언제였나요.

“중학교 2학년 때 국어시간에 선생님이 김영랑의 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을 가르치면서 시를 한 편씩 써오라는 숙제를 내주셨어요. 선생님이 ‘호승이 니 숙제해왔나? 해왔으면 한 번 읽어봐라’ 하셨어요. 키가 작아 앞줄에 앉아있던 저는 깜짝 놀라 일어나 읽었죠. 낭독이 끝나자 선생님은 빡빡 깎은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호승이 니는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시인이 될 수 있겠다’. 이 말씀이 제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어요.”

-어떤 시를 써갔습니까.

“제목은 ‘자갈밭’이에요. 겨울에는 범어천의 물이 말라 자갈이 많이 보였거든요. 나는 이 세상에 왜 태어났나,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한가, 엄마는 왜 저렇게 고생을 하시는가 하는 소년의 마음을 담았어요. 당시 제 마음이었어요.”

-그때부터 시를 창작했나요.

“그랬어요. 제가 다닌 학교가 계성중학교인데, 김동리·박목월 선생의 모교예요. 국어선생님 중에 현역 문인들이 많이 계셔서 학생들의 문예창작에 관심이 컸죠. 매달 학생들의 문예작품을 모집해 상을 줬어요. 부상으로는 교내 매점에서 빵이나 학용품을 살 수 있는 상품권을 줬고요. 저는 매번 당선됐어요.”

-어느 날 갑자기 글재주가 생긴 건 아닐 텐데요.

“아버지가 은행을 퇴직하시기 전에 한국문학전집 33권짜리를 집에 들여놓으셨어요. 중학교 1, 2학년 때였는데 열심히 읽으면서 좋은 문장들은 옮겨 적었어요. 고등학생이 되고서는 어머니가 용돈을 주실 때마다 헌책방에 갔어요. 당시 유일한 문예지가 ‘현대문학’이었고, 발매 시기에 따라 10원, 20원 했어요. 저는 늘 10원을 주고 사봤어요.”

1979년 첫 번째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를 발표한 정호승 시인은 두번째 시집 <서울의 예수>를 1982년 출간한다. 그리고 5년 만인 1987년 <새벽편지>를 펴냈다. 그는 “이한열·박종철 사건을 비롯해 시대적 죽음이 많았던 1987년 시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 김창길 기자

시대의 눈물 닦아야 한다는 생각에
1980~90년대 현실참여적 시 썼지만
2000년대 ‘내 눈물부터 닦자’로 변화

그는 ‘고교문예의 성찰’이라는 평론으로 1968년 경희대 국문학과에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장학금을 계속 받으려면 문단에 등단해야 했지만 쉽지 않았다. 2학년 때 휴학하고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1970년 1월 군에 자원입대했다. 춘천 야전 공병단에 소속돼 1년간 행정직으로 있다가 이후 2년간은 군종병(군대 내에서 이뤄지는 종교 활동을 보조하는 병사)으로 근무했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된 후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당선됐다. 그의 등단 50년의 기준은 1973년 신춘문예 당선이다.

-군 복무 중에 어떻게 시를 썼습니까.

“주머니 속에 메모지를 넣고 다니며 불침번을 서거나 보초를 서면서 시를 썼어요. 신춘문예 당선으로 복학 후 장학금을 그대로 받을 수 있었어요.”

그는 유일하게 외우는 자작시라며 ‘첨성대’를 읊었다. “할머님 눈물로 첨성대가 되었다/ 일평생 꺼내 보던 손거울 깨뜨리고/ 소나기 오듯 흘리신 할머니 눈물로/ 밤이면 나는 홀로 첨성대가 되었다// 한단 한단 눈물의 화강암이 되었다/ 할아버지 대피리 밤새 불던 그믐밤/ 첨성대 꼭 껴안고 눈을 감은 할머니/ 수놓던 첨성대의 등장불이 되었다// (하략)

-‘첨성대’는 어떻게 나온 시인가요.

“외할머니가 경주에서 사셨어요. 어릴 때 경주에 가면 첨성대에 기어오르고 창을 통해 안에도 들어가 놀았죠. 첨성대 부근은 다 논밭이고, 초가집들과 우물이 있었어요. 제가 고등학생일 무렵 그 초가집 중 한 집에 제 사촌형들이 자취를 했어요. 거기에 외할머니가 자주 가셔서 손자들을 위해 밥해주고 빨래를 해주셨어요. 저도 방학 때면 자주 놀러갔어요. 첨성대의 곡선에서 강한 여성성을 느꼈어요. 한복을 입은 여성, 어머니, 또는 외할머니의 모습을요.”

정 시인은 1976년 대학을 졸업했다. 숭실고 교사를 하다 3년 만에 그만뒀다. 이후 ‘주부생활’, ‘샘터’, ‘여성동아’, ‘여성조선’, ‘월간조선’에서 기자생활을 하다 1991년 마흔한 살에 나왔다. 기자로 일하던 1982년 <서울의 예수>, 1987년 <새벽편지>, 1990년 <별들은 따뜻하다>를 각각 펴냈다.

-1976년 김창완, 김명인, 김성영, 이동순 시인과 함께 반시(反詩)동인을 결성했지요.

“1960년대 우리나라 시인들의 시는 관념적이고 난해한 시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1970년대 시인인 우리는 쉬운 일상의 우리말로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구체성에 뿌리를 내려서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죠. 제 시의 언어 재료는 일상의 쉬운 우리말이에요. 그런데 한글전용정책은 잘못됐어요. 한자를 병용하지 않으면 의미를 알 수 없는 우리말이 적지 않기 때문이에요.”

-반시동인 정신의 영향으로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 <별들은 따뜻하다> 등 1980~90년대 작품에는 현실참여적 시가 주류를 이루더군요.

“시인으로서 시대의 눈물을 닦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2000년대 이후에는 나 자신의 눈물도 닦지 않고 어떻게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을 수 있는가로 변화했어요. 그래서 이번 시집은 저라는 개인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의 삶이 연결되는, 그럼으로써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할 수 있어요. 과거에는 시집에 사인해줄 때 ‘시는 우리 시대의 눈물을 닦아줍니다’라고 썼지만 요즘은 ‘시는 인간을, 인생을, 사랑을 이해하게 합니다’라고 써요.”

-바쁜 기자생활 중에는 어떻게 시를 썼습니까.

“1982년이면 제가 서른두 살이에요.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때죠. 그런데 그해에 <서울의 예수>를 발표하고 5년간 한 편도 안 쓰다가 1987년에야 한꺼번에 몰아서 썼어요. 그러니 썼다고 말하기 부끄러워요. 제 세 번째 시집인 <새벽편지>는 출근 후 점심식사를 거르고 썼어요. 1987년은 우리 현대사의 격동기잖아요. 이한열·박종철 사건을 비롯해 시대적인 죽음이 많았던 시절이죠. 시를 쓰지 않을 수 없었어요. 이후에는 또 3년이 지나서야 <별들은 따뜻하다>를 발표했고요.”

-<새벽편지>에 김광석씨의 유작이 된 ‘부치지 않은 편지’의 노랫말이 된 동명시가 수록돼 있지요. 노래 가사로 쓰인 정 시인의 시가 70곡이 넘는 것으로 알아요.

“100만 장 이상 음반이 판매된 이동원씨의 ‘이별노래’가 가장 히트한 곡이고요. 안치환씨의 ‘우리가 어느 별에서’,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풍경 달다’도 제 시로 지은 노래예요. 양희은씨의 ‘수선화에게’, 김원중씨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도 그렇고요.”

-저작권료도 꽤 되겠는걸요.

“아니에요. 저는 문학인이다 보니 1997년까지는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회원이 아니었어요. 그러다 1997년에 ‘부치지 않은 편지 1·2’를 담은 김광석씨 1주기 추모음반 ‘가객’이 발매됐잖아요. 음반을 기획한 백창우씨가 협회에 가입해야 저작권료를 지급할 수 있다며 가입하라더군요. 그래서 이후부터는 받았지만 이전 곡들에 대해 소급해 주지는 않죠(웃음).”

‘부치지 않은 편지’는 정 시인이 1987년 경찰의 물고문으로 사망한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생각하며 쓴 시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에 추모곡으로 쓰이기도 했다.

-기자생활은 왜 그만뒀습니까.

“소설에 대한 꿈이 있었어요. 제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위령제’라는 단편소설을 큰아들 이름으로 출품해 당선됐거든요. 이후 소설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어요. 그러다 퇴직 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잘 안 됐어요. 6~7년간 소설 쓴다며 아까운 시간을 허비한 거예요. 사람마다 자신의 문학적 기질에 맞는 장르가 있다는 것을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서야 깨달은 거예요. 이러다 시도 못 쓰겠다 싶어 IMF 외환위기가 발생한 1997년에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를 발표했어요.”

-제목이 격정적이에요.

“중국 당나라 때 임제 선사가 공부하는 선승들에게 하신 말씀이에요.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공부하다가 죽어버려라’라고 했죠. 저는 사랑하다가 죽어버리라는 그 말씀이 가슴에 깊게 와 닿았어요. 언젠가 시집 제목으로 삼으리라 마음먹고 있었어요.”

1998년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2000년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를 펴냈다. 2000년부터 2002년까지 3년간 출판사 ‘현대문학북스’ 대표를 맡아 위탁 경영한 것을 끝으로 그는 더 이상 직장생활은 하지 않았다. 2004년 시집 <이 짧은 시간 동안>을 펴내고부터는 3년 터울로 시집을 발표했다.

정호승 시인의 시 ‘명동성당’이 새겨진 서울 명동성당의 시비 / 정호승 시인 제공

바지 왼쪽 주머니엔 늘 메모지
지하철·길거리서 시구 등 기록
“나에게 시는 내 영혼의 밥”

-지금도 메모를 습관적으로 하나요.

“제 바지의 왼쪽 호주머니 속에 항상 메모지가 들어있어요. A4용지 절반만 한 크기의 용지를 접어서 매일 아침 외출할 때 넣어두거든요. 펜은 셔츠 왼쪽 가슴에 꽂고 다니고요. 시구가 아니라도 어떤 생각들이 떠오르면 지하철에서든 길거리에서든 그때그때 기록해둬요. 며칠 지나 앞뒤로 빼곡하게 채워지면 또 다른 종이를 가지고 나가죠. 부족하면 스마트폰 메모창을 이용하고요. 그렇게 적어놓은 것을 파일로 정리해 노트북에 저장해둬요.”

-시를 쓸 때 정 시인만의 루틴이 있습니까.

“제목부터 정해요. 그리고 마음이 비교적 평온하고 컨디션이 좋을 때 몰아서 써요. 짧게는 3개월, 길게는 6개월 정도 시를 쓸 때의 마음은 아주 고조되거나 긴장돼 있어요. 이 기간에는 꼭 필요한 약속 아니면 외출도 잘 안 해요. 그렇게 100편 정도의 시를 써서 한 권의 시집이 나오는 거예요.”

-정 시인에게 시는 한 마디로 뭔가요.

“내 영혼의 밥이죠.”

올해 그에게는 뜻깊은 경사가 잇따라 생겼다. 지난 6월 6일 고 김수환 추기경(1922∼2009)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서울 명동성당에 세워진 시비(詩碑)에 정호승 시인의 시 ‘명동성당’이 한글과 영문으로 새겨졌다. 또 대구광역시는 이르면 12월, 늦으면 내년 봄에 정 시인이 고교 때까지 살던 곳에 정호승기념관을 연다.

박주연 선임기자 j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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