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 발행·예금 금리 인상 묶인 채 대출만 ‘펑펑’ 요구받는 은행권…유동성 문제 없을까

김현주 2022. 11. 27.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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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선 “각종 금융 지원만 은행에 계속 요구하는 건 ‘뜨거운 아이스커피’ 주문하는 것과 마찬가지” 지적도
연합뉴스
 
당국이 사실상 은행채 발행과 예금금리 인상 등 은행의 자금 조달 길을 막고 기업 대출만 독려하면서 자금 경색, 유동성 위기가 결국 은행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연말 만기가 돌아오는 은행채 규모가 작지 않은데 지금처럼 대출만 월 수조 원씩 계속 빠져나가면, 실제로 당장 다음 달 은행 유동성 비율이 지금 수준보다 큰 폭으로 떨어질 전망이다.

27일 금융권과 연합인포맥스에 따르면 5대 은행(KB·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은행채 일별 순발행 실적은 지난달 21일 KB국민은행의 1천400억원이 마지막이다.

한 달 닷새 가까이 5대 은행이 만기가 도래한 은행채를 갚기(상환)만 했을 뿐 새로 은행채를 팔아 자금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심지어 하나은행의 경우 9월 26일 1천300억원 순발행 이후 두 달째 은행채 순발행 실적이 없다.

이는 레고랜드 사태 등으로 채권시장의 자금 경색이 뚜렷해지자 금융당국이 금융지주와 은행들에 은행채 발행을 자제하라고 주문했기 때문이다.

대표적 우량 채권인 은행채가 채권 발행 시장을 장악하면, 상대적으로 덜 매력적인 일반 회사채에 대한 수요가 더 줄고, 금리는 더 뛰며, 발행 유찰과 자금 경색이 심해질 수 있다는 게 정부의 우려다.

은행채로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은행이 의존할 수 있는 주요 자금원은 예·적금뿐이다.

최근 은행들이 앞다퉈 정기 예·적금 금리를 5% 안팎까지 높인 것도, 8월과 10월 빅 스텝(기준금리 0.50%포인트 인상)을 포함해 한국은행이 잇따라 기준금리를 올린 영향도 있지만 결국 자금 조달 경쟁의 결과다.

하지만 이제 금리 인상을 통한 자금 유치조차 여의치 않은 상태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앞서 25일 "금융권의 과도한 자금확보 경쟁은 금융시장 안정에 교란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는 만큼 업권간, 업권내 과당 경쟁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은이 지난 24일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올렸지만, 이런 일종의 '경고' 탓에 5대 은행 가운데 단 한 곳도 27일 현재까지 아직 예금 금리를 따라 올리지 않고 있다.

최근 수개월 동안 은행들이 기준금리 인상 당일 곧바로, 심지어 기준금리 인상 폭 이상의 예·적금 금리 상향 조정을 발표해온 것과 대조적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기준금리 인상 이후에도 시중은행 수신(예금) 상품 금리 인상 움직임이 없는 것은 예금 금리 인상 경쟁에 대한 금융 당국의 잇단 경고성 메시지를 고려한 정무적 판단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은행이 대출금리는 빨리 올리는 반면 예금금리는 천천히 올린다는 지적을 수용, 7월부터 월별 예대금리차 공시까지 도입하면서 예금금리 인상을 독려한 것도 정부"라며 "이제 은행으로 돈이 너무 몰려 저축은행·증권사 등이 어렵다며 금리 인상을 자제하라는 것인데, 대응이 너무 근시안적이고 즉흥적"이라고 꼬집었다.

약 열흘 전 일부 시중은행의 정기예금 금리가 5%를 넘어섰다가 현재 다시 4%대로 내려온 것도, "그사이 시장금리 변동을 반영했다"는 은행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당국의 압박을 고려한 조정이라는 해석까지 나오고 있다.

이처럼 은행채 발행과 예금 금리 인상이 막혀 유동성 추가 확보가 어려운 가운데 은행의 기업 대출만 계속 늘면서 은행 유동성 관련 지표도 불안한 상태다.

한은에 따르면 10월 말 은행권의 기업 원화 대출 잔액은 1천169조2천억원으로 한 달 새 13조7천억원(대기업 9조3천억원)이나 불었다. 10월 기준으로 2009년 6월 통계가 시작된 이후 역대 최대 증가 폭이다.

5대 은행만 봐도, 지난달 기업 대출이 9조7천717억원 급증했고, 이달 들어서도 24일까지 증가액이 4조2천838억원(10월 말 704조6천707억원→708조9천545억원)에 이른다.

회사채 발행에 어려움을 겪는 기업들이 계속 은행 대출 창구로 몰려들고, 금융당국도 금융지주 회장 등에게 대출 등의 기업 지원을 당부했기 때문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은행 유동성 지표가 나빠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며 "특히 12월에 만기가 도래하는 은행채가 꽤 많은데, 차환을 위한 은행채 발행은 어려운데 대출은 계속 빠져나가기 때문에 11월 초중순까지 거의 100% 수준이었던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이 최근 90%대 후반으로 내려왔고, 12월에는 90%대 중반까지 낮아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자금 시장이 현재 다소 안정을 찾았다고 하지만, 두 번째 충격이 오면 은행도 버티지 못하고 건전성에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정부는 현재의 자금시장 불안이 단기에 끝나는 것을 가정하고 은행에 양립할 수 없는, 과도한 주문을 하는 것으로 해석된다"며 "하지만 여러 변수 탓에 자금시장 경색이 다시 심해질 경우 내년 1분기께 이후에는 은행 체력(유동성)도 고갈돼 더는 방파제 역할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은행에만 의존하지 말고 플랜 B를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최근 주요 시중은행 자금담당 임원들은 금융위원회와의 비공개회의에서 이런 어려움을 호소하며 은행채 발행 허용, LCR 기준 강화 유예 외 추가 완화, 순안정자금조달비율(NSFR) 규제 완화 등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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