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홀대받을 수 없는 의병과 독립의 깃발

김형민 입력 2022. 11. 27.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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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민 PD의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나폴레옹에 맞선 스페인 시민들의 투쟁은 역사에 굵직하게 기록될 만큼 치열했다. 국가 간 정규군끼리의 충돌로만 본다면 스페인에서 전쟁은 없었다. 하지만 과연 전쟁이 없었을까?
고야의 ‘1808년 5월3일의 학살’. 프랑스 군대가 스페인 민병대를 진압하는 모습을 담았다. ⓒWikipedia

나폴레옹이 유럽을 호령하던 즈음 스페인은 한심한 왕가의 지배하에 있었어. 카를로스 4세(1748~1819)는 왕비가 다른 남자와 놀아나는 것도 몰랐고, 되레 그 남자를 요직에 기용하며 나라를 좌지우지하게 만든 멍청한 남자였다. 왕비의 정부(情夫) 고도이는 나폴레옹과 이런 거래를 하지.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영국과 교역하는 포르투갈이 괘씸하시죠? 스페인이 길을 빌려 드리겠습니다. 대신 포르투갈을 나눠 가지시지요.” 이유는 간단했어. “포르투갈을 3등분하여 스페인과 프랑스가 나눠 가지고 3등분한 땅의 하나를 고도이와 그의 가족에게 공국(公國)으로 넘겨준다는 약속을 받아냈다(〈한 권으로 읽는 스페인 근현대사〉 서희석 지음).”

프랑스군은 풍악을 울리며 피레네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진입했고 포르투갈을 손쉽게 점령했다. 자고로 외국 군대란 들이기는 쉬워도 내보내기란 쉽지 않은 법. 프랑스군은 각지의 요지를 점거하고 눌러앉을 태세를 보였다. 심지어 1808년 3월 나폴레옹의 매제 조아킴 뮈라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마드리드를 향해 진군하자 무력한 왕과 왕비, 왕비의 애인 고도이는 허겁지겁 도망가버려. 임진왜란 때 도성을 버리고 도망간 임금에게 분노해 경복궁에 불을 지른 조선 백성들처럼 스페인 사람들도 격분한다. “이런 왕이 어디 있어!” 고도이의 전횡에 독이 올라 있던 귀족과 성직자들, 일반 시민들 모두가 들고일어났고, 카를로스 4세의 아들 페르난도 7세가 왕위에 오르게 돼.

하지만 페르난도 7세 역시 부전자전, 나을 게 없는 사람이었어. 그는 자신의 왕위를 보장받겠다며 나폴레옹에게 접근했고, 쫓겨난 그의 아버지는 나폴레옹에게 달려가 저 불효막심한 아들놈을 매우 쳐달라고 손바닥을 비볐다. 이 한심한 국왕 부자를 지켜보던 나폴레옹은 페르난도 7세에게 왕좌를 본인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에게 양보하고 여생을 편안히 보내라는 제안(이라고 쓰고 협박이라고 읽는다)을 건네지. 그런데 스페인 국민이 기껏 봉기를 일으켜 왕관을 머리에 얹어준 페르난도 7세는 맥없이 받아들이고 만다.

1808년 5월 프랑스군이 다른 왕실 가족들도 프랑스 영내로 옮기려 할 때, 마드리드 시민들은 프랑스군을 막고 나선다. “차라리 우리를 데려가라.” 마드리드 시민들은 프랑스군에 거의 맨주먹으로 달려들었다. 뮈라 장군은 계엄을 펴고 저항하는 마드리드 시민들을 살해했어.

마드리드의 소식이 스페인 각지로 전파되자 스페인 사람들은 분연히 일어선다. “갈리시아, 안달루시아, 아라곤, 카스티야, 카탈루냐 등 출신 지방을 막론하고 이때만은 스페인 모두가 합심해서 무슬림 세력을 몰아내던 때처럼(위의 책, 서희석 지음)” 유럽의 지배자 나폴레옹에게 맞섰다. 발렌시아의 장터에서 땔감 장수 빈센테 도미니크는 이렇게 외친다. “나 가난한 땔감 장수 빈센테 도미니크는 나폴레옹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페르난도 7세 만세.”

스페인 북부 아라곤의 주도 사라고사를 둘러싼 공방전에서 프랑스군의 포화가 성벽 곳곳을 허물어뜨리던 즈음, 아구스티나라는 이름의 한 젊은 여성이 성벽에 오른다. 포병으로 전투 중이던 연인에게 음식을 전해주려 했지만 이미 연인의 부대는 전멸한 상황. 이윽고 아구스티나는 아우성치며 몰려드는 프랑스군을 향해 연인이 미처 사용하지 못한 대포에 불을 댕긴다. 사라고사는 일단 프랑스군을 물리치지만 두 번째 포위전에서는 인구의 태반이 목숨을 잃고서 무릎을 꿇었다. 그래도 ‘아라곤의 아구스티나’는 전투를 계속했고 후일 스페인에 상륙한 영국군 소속 보병 장교가 돼 프랑스군을 괴롭혔지.

대한제국이 ‘전쟁 없이’ 망한 건 절대 아니다

스페인 정규군은 거의 없었지만 프랑스군에게 적은 무한대였다. 프랑스군은 평범한 복장의 농민들에게, 허름한 상인들에게, 지팡이 짚은 노인에게, 심지어 빵 굽는 여인들에게 칼을 맞고 도끼에 찍혀 쓰러졌다. 스페인인들은 이런 투쟁을 ‘게릴라(소규모 전투)’라고 불렀어. 제복을 입지 않은 민병대가 익숙한 지형에 출몰하며 적에 맞서는 ‘게릴라전’의 이름이 인류 역사에 등장한 것이지.

그런데 스페인 게릴라들이 애타게 부른 페르난도 7세는 프랑스의 휴양지에서 호화롭게 지내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는 오히려 스페인의 악습인 이단 심판과 봉건제도를 폐지하는 등 개혁정책을 폈지만 페르난도 7세는 그야말로 수구의 끝판왕이었다. 1812년 프랑스군의 점령을 면한 도시 카디스에서 시민들이 모여 입헌군주제와 보통선거, 삼권분립 등을 규정한 자유주의 헌법을 제정하지만, 나폴레옹 몰락 이후 열광적인 “국왕 폐하 만세” 소리 속에 귀국한 페르난도 7세는 이 헌법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심지어 이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이들을 잔인하게 처형했다.

나폴레옹이라는 골리앗을 쓰러뜨린 스페인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이 과거의 미몽에서 깨어나는 데에는 훨씬 더 오랜 고통의 시간이 필요했다. 목숨 바쳐 옹위한 페르난도 7세의 반동 정치는 이후 19세기 스페인을 침체의 늪에 빠뜨렸고, 유럽의 다른 나라 사람들이 누리는 권리를 향유하는 데에는 나폴레옹에 맞선 전쟁보다도 오랜 기간을 버텨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의 투쟁은 역사에 굵직하게 기록될 만큼 치열했다. “당신은 모든 집들이 요새로 돌변하고, 모든 이들이 한뜻으로 뭉치는 이곳 백성들을 잘 모릅니다. 우리가 정복자로 행세하는 한 사람의 스페인인도 우리 편에 서지 않을 것입니다”(〈나폴레옹 전쟁〉 그레고리 프리몬 반즈, 토드 피셔 지음)라는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의 절규는 빈말이 아니었지.

얼마 전 대한민국 여당의 비상대책위원장 정진석 의원이 “조선은 썩어 문드러져 스스로 망했고 일본은 조선 왕조와 전쟁한 적이 없다”라고 뇌까릴 때 아빠는 스페인 생각을 했다. 스페인에도 썩어 문드러진 왕은 있었고, 자신의 신민들을 학살하는 적에게 붙어 호의호식하는 왕가도 있었다. 스페인 정규군이 프랑스군에 맞선 일도 거의 없었어. 그렇다고 해서 정진석 의원이 “스페인은 전쟁한 적이 없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전쟁을 국가 간 정규군끼리의 충돌로만 본다면 스페인에서도 ‘전쟁은 없었다’. 하지만 과연 전쟁이 없었을까?

조선과 대한제국의 지배자들은 페르난도 7세 이상으로 ‘썩어 문드러져’ 있었고, 비겁했으며, 자신의 신민들에게 잔인했어. 하지만 적어도 조선은, 대한제국은 ‘전쟁 없이’ 망한 건 절대 아니었어. 수십만의 사람들이 죽창을 들고 화승총을 들고 몽둥이라도 휘두르면서 거인 같은 침략자와 싸웠고, 피를 뿌리며 쓰러져갔다. 전쟁을 치르지 않은 것은 페르난도 7세였지 스페인 민중이 아니었듯이 말이다.

스페인 사람들이 왕에게 배신당하고 그들 역시 과거의 관성에서 깨어나지 못해 암울한 시기를 보냈다고 해서 독립전쟁 중 외쳤던 ‘페르난도 7세 만세’라는 함성의 가치가 떨어지지는 않는다. 후세 사람들 보기에 좀 무모하고 어떨 때는 안쓰럽고,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이들로 비칠망정, “그들이 얼마나 독립에 도움이 됐겠느냐”라는 무엄한 소리에 시달릴망정, 의병과 독립의 깃발을 들었던 사람들은 우리 역사에서 결코 홀대받을 수 없는 보배요, 보석들일 거야. 오늘날 스페인 사람들은 나폴레옹에게 맞섰던 이 전쟁을 ‘스페인 독립전쟁’이라 부르며 영웅들을 기리고 있다. 골리앗 같은 일본군에 맞서다가 쓰러져갔던 ‘게릴라’ 의병들과 독립군들을, 그리고 우리들의 ‘독립전쟁’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와 같지 않을까.

김형민(SBS Biz PD)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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