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언인가 능멸인가…“남자가 그것도 없으면서 여자에 목숨걸지 마세요” [씨네프레소]
◆ 씨네프레소 ◆
[씨네프레소-57] 영화 ‘쌍화점’
많은 이가 명절 때 상처 받는다. 친척이 한데 모이는 설과 추석은 집안의 걱정이 한곳에 응집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물론 개중엔 애초에 상처를 주기 위한 목적으로 건네는 염려의 말도 있지만, 때때로 우리는 가족의 진심 어린 걱정에도 상처를 받는다. 왜 애정에서 우러나온 걱정이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로 남을까. 따뜻한 관심에서 비롯된 걱정을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너무 예민한 건 아닐까. 오늘 소개할 ‘쌍화점’(2008)에는 이 질문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바로 주인공 홍림(조인성)과 그가 아끼는 후배 한백(임주환)의 관계에서다. 홍림이 자신의 평판을 걸고 조직에서 보호해준 한백은 누구보다도 홍림을 따르지만, 어느 날 성불구가 된 선배 인생을 진정으로 걱정해서 건넨 한 마디 때문에 상대에게 큰 상처를 주고 만다.
홍림과 한백의 관계를 살펴보기 전에 영화 줄거리를 훑어보자. 고려 말 원 간섭기에 고려의 왕(주진모)은 서른 여섯명의 미남자를 선발해 왕 친위 부대인 건룡위를 조직한다. 건룡위 총관인 홍림은 무예와 통솔력이 뛰어난 조직의 핵심 인물일 뿐 아니라 왕과 동침하는 사실상의 애인 사이다. 그러나 후사를 요구하는 원의 압박에 왕은 홍림에게 왕후(송지효)와 합방할 것을 명한다. ‘여자를 안을 수 없는’ 자신을 대신해 홍림이 왕후와 아이를 만들길 요구한 것이다. 왕의 비상식적인 명령을 억지로 수행하며 잠자리를 갖던 도중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게 되고, 몇 차례 눈감아 줬음에도 점점 수위를 높여가는 두 사람의 애정 행각에 왕은 홍림을 처벌하게 된다. 그를 죽이는 대신 거세함으로써 자신이 느낀 치욕감을 돌려준 것이다.
한백이 홍림에게 얼마나 충성했는지는 왕후가 그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왕후는 감금된 홍림을 궁에서 탈출시키려 하는데, 그 이유는 과거 두 사람이 가진 관계로 인해 수태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왕이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임신과 관련된 모든 자를 살해할 것이라고 왕후는 예상한다. 이때 왕후가 제일 먼저 찾는 사람이 한백이다. 왕을 지키는 것이 제일 목적인 조직에 소속된 한백이 왕명보다 홍림의 안위를 우선해서 챙기리라고 확신한 것이다. 실제 한백은 왕후의 서찰을 받자마자 건룡위 구성원 일부를 이끌고 홍림을 구출한다. 자신과 뜻을 함께한 무리가 전부 궁에서 쫓겨나 도망자 신분으로 살더라도 홍림을 구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무언가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로 주목 받는 것에 불편함을 느낀다. 많은 사람이 꾸는 벌거벗고 공공장소에 가는 꿈은 이를 보여준다. 꿈의 주인공은 바지를 갖춰 입지 않은 자신에게 타인의 눈길이 모이는 상황에 당황한다. 이 꿈은 인간이 자신에게 결핍된 요소에 시선이 집중되는 상황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사례는 꿈이 아닌 현실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과제를 수행하지 않은 채 수업이나 회의에 참석했는데 주최자가 시간이 다하도록 이를 언급하지 않을 때 당사자는 안도감을 느낀다. 이럴 때 제일 원망 받는 참석자는 굳이 ‘과제 검사 안 하느냐’고 손을 들어 묻는 사람이다. 그가 미운 이유는 과제를 잊은 당사자가 감점 등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을 높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과제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다수의 시선이 집중되는 껄끄러운 상황을 만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특정 집단에서 편안함을 느끼기 위해서도 자신의 결핍으로 인해 느껴지는 이질감이 없어야 한다. 그 조직에 발을 들일 때마다 “당신은 비록 우리 모두가 가진 것을 지니고 있지 못하지만, 우리는 당신을 환영한다”고 느껴지게 하는 곳에서 환영 받는 느낌을 갖긴 힘들 것이다. 이미 내 결핍이 주목 받고 있다는 사실에 거북해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명절에 오가는 걱정을 불편하게 여기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친척의 걱정이란 보통 결핍에 대한 것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학벌, 직장, 애인, 배우자, 자녀, 부동산 등 상대가 아직 갖지 않은 것에 대해서 언제쯤 가질 예정이냐고 물으며 걱정한다. 순간 다른 친척들의 관심도 그가 가진 결핍에 집중된다. 그러나 이런 걱정이 큰 의미가 없는 이유는 본인에게 무언가가 없다는 사실을 그 자신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먼저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런 결핍이 화제로 오르는 상황을 유쾌하게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결핍에 대한 걱정은 그것을 진정으로 갖고 싶은데 못 가진 사람에게만 불쾌하게 다가가는 것은 아니다. 저런 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거나 가치관에 따라서 일부러 멀리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남이 이에 대해 걱정해주는 상황은 불편할 수 있다. 일단 그가 걱정을 입 밖으로 꺼냄으로 인해 상대방은 그가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학벌, 직장, 혼인 등) 무엇인지 인식하게 된다. 이어 그의 머릿속에서 자신은 그것을 갖추지 ‘못한’ 사람으로 인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저런 걱정은 단 한 번 입밖으로 꺼내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의 기분을 명절 내내 망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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