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언인가 능멸인가…“남자가 그것도 없으면서 여자에 목숨걸지 마세요” [씨네프레소]

박창영 기자(hanyeahwest@mk.co.kr) 2022. 11. 26.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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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네프레소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전개 방향을 추측할 수 있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씨네프레소-57] 영화 ‘쌍화점’

많은 이가 명절 때 상처 받는다. 친척이 한데 모이는 설과 추석은 집안의 걱정이 한곳에 응집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물론 개중엔 애초에 상처를 주기 위한 목적으로 건네는 염려의 말도 있지만, 때때로 우리는 가족의 진심 어린 걱정에도 상처를 받는다. 왜 애정에서 우러나온 걱정이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로 남을까. 따뜻한 관심에서 비롯된 걱정을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너무 예민한 건 아닐까. 오늘 소개할 ‘쌍화점’(2008)에는 이 질문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바로 주인공 홍림(조인성)과 그가 아끼는 후배 한백(임주환)의 관계에서다. 홍림이 자신의 평판을 걸고 조직에서 보호해준 한백은 누구보다도 홍림을 따르지만, 어느 날 성불구가 된 선배 인생을 진정으로 걱정해서 건넨 한 마디 때문에 상대에게 큰 상처를 주고 만다.

고려 말 원 간섭기를 배경으로 한 ‘쌍화점’은 공민왕 이야기를 기반으로 허구를 많이 가미한 ‘팩션’(팩트+픽션)이다. 왕의 호위 무사 홍림(왼쪽)을 조인성이, 왕을 주진모가 연기했다. [사진 제공=쇼박스]
왕후와 사랑에 빠진 호위 무사 … “저놈의 뿌리를 뽑아라”

홍림과 한백의 관계를 살펴보기 전에 영화 줄거리를 훑어보자. 고려 말 원 간섭기에 고려의 왕(주진모)은 서른 여섯명의 미남자를 선발해 왕 친위 부대인 건룡위를 조직한다. 건룡위 총관인 홍림은 무예와 통솔력이 뛰어난 조직의 핵심 인물일 뿐 아니라 왕과 동침하는 사실상의 애인 사이다. 그러나 후사를 요구하는 원의 압박에 왕은 홍림에게 왕후(송지효)와 합방할 것을 명한다. ‘여자를 안을 수 없는’ 자신을 대신해 홍림이 왕후와 아이를 만들길 요구한 것이다. 왕의 비상식적인 명령을 억지로 수행하며 잠자리를 갖던 도중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게 되고, 몇 차례 눈감아 줬음에도 점점 수위를 높여가는 두 사람의 애정 행각에 왕은 홍림을 처벌하게 된다. 그를 죽이는 대신 거세함으로써 자신이 느낀 치욕감을 돌려준 것이다.

‘쌍화점’에서 왕은 원에 내정을 간섭당하는 상황에 심한 굴욕감을 느낀다. [사진 제공=쇼박스]
감독은 세 사람의 치정극을 중심에 놓고 주변 인물의 관계를 흥미롭게 배치함으로써 몰입도를 높인다. 홍림과 라이벌 관계에 있으면서도 어렸을 때부터 함께 지낸 정 때문에 그에게 연민을 느끼는 부총관 승기(심지호), 앞에선 왕에게 존경을 표하지만 속으론 원나라 출신인 자신이 더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왕후의 오빠(조진웅) 등을 등장시켜 국가 혼란기에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생존해나가는 인간 군상을 그렸다. 한백도 비중 있게 그려지는 인물 중 하나다. 궁녀와 함께 궁을 탈출하려다가 생포당한 그는 ‘목을 베라’는 왕의 명령에도 목숨을 부지한다. 홍림이 스스로 위험해질 것을 무릅쓰고 왕에게 그를 한 번 용서해달라고 간청한 덕이다. 한백은 이후 홍림을 그림자처럼 따르며 홍림이 주도하는 모든 일에서 솔선수범한다.
한백은 궁녀와 도망치다가 생포당한다. 홍림이 왕에게 그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간청하며 한백은 한번 더 기회를 부여받게 된다. [사진 제공=쇼박스]
“왕후를 구출해서 뭐합니까. 형님은 거세당한 남자입니다”

한백이 홍림에게 얼마나 충성했는지는 왕후가 그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왕후는 감금된 홍림을 궁에서 탈출시키려 하는데, 그 이유는 과거 두 사람이 가진 관계로 인해 수태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왕이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임신과 관련된 모든 자를 살해할 것이라고 왕후는 예상한다. 이때 왕후가 제일 먼저 찾는 사람이 한백이다. 왕을 지키는 것이 제일 목적인 조직에 소속된 한백이 왕명보다 홍림의 안위를 우선해서 챙기리라고 확신한 것이다. 실제 한백은 왕후의 서찰을 받자마자 건룡위 구성원 일부를 이끌고 홍림을 구출한다. 자신과 뜻을 함께한 무리가 전부 궁에서 쫓겨나 도망자 신분으로 살더라도 홍림을 구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한 것이다.

영화 속 건룡위는 실제 역사의 ‘자제위’를 모델로 삼았다. 고려 공민왕은 미남자로 자제위를 구성해 좌우에서 시중을 들게 했다. [사진 제공=쇼박스]
그러나 사랑에 눈이 멀어버린 홍림이 왕후를 구하러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며 한백은 더 큰 고민에 빠지게 된다. 거세 당한 후 몸을 채 회복하지 못한 홍림이 혼자서 궁궐로 침투해 왕후를 구출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 물론 홍림이 왕후 구출을 시도하다가 잡혔을 때 건룡위 일당에게 괘씸죄가 더해져 왕실로부터 더욱 격한 추격을 받게 될 것이 우려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도망자 신분으로 살겠다고 결심하고 궁에서 나온 점을 감안해봤을 때, 한백이 그를 만류하는 것은 진정 홍림의 안전이 걱정됐기 때문으로 보는 편이 합리적일 것이다. 한백은 자신의 염려를 귓등으로 듣는 홍림에게 말한다. “정 그렇다면 가십시오. 한데 마마를 뫼시고 나와서 어쩌시게요? 평생 바라만 보시겠습니까? 마마가 퍽이나 행복해 하시겠습니다.”
왕의 명령을 받고 잠자리를 갖던 두 사람은 깊은 사랑에 빠진다. 홍림은 자신을 비난하는 왕에게 “연모의 정을 알게 해줘서 고맙다”고 한다. [사진 제공=쇼박스]
한백은 홍림의 계획이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왕후를 구출하는 목적은 결국 두 사람이 함께 행복해지는 것일 텐데, 거세당한 홍림으로서는 왕후를 행복하게 해줄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다. 홍림의 눈빛엔 한백을 향한 경멸과 수치심이 지나간다. 말을 돌려서 했지만 결국 한백의 말은 “당신은 거세된 남자”라는 뜻이기 때문에 홍림이 모멸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화도 내지 않고 말을 타고 떠나는 홍림은 한백에게 인간적으로 큰 실망을 한 듯 보인다. 아무리 자신을 걱정해서 한 말이라고 한들 그건 홍림으로선 견딜 수도 견딜 필요도 없는 모욕인 것이다.
홍림의 라이벌인 부총관(오른쪽)조차 그를 거세하라는 왕의 명령에 머뭇댄다. 궁형은 어떤 면에선 사형보다 더 심한 형벌로 여겨졌던 것이다. [사진 제공=쇼박스]
벌거벗고 외출을 하는 꿈 … 결핍에 시선이 집중되는 것에 대한 공포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무언가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로 주목 받는 것에 불편함을 느낀다. 많은 사람이 꾸는 벌거벗고 공공장소에 가는 꿈은 이를 보여준다. 꿈의 주인공은 바지를 갖춰 입지 않은 자신에게 타인의 눈길이 모이는 상황에 당황한다. 이 꿈은 인간이 자신에게 결핍된 요소에 시선이 집중되는 상황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사례는 꿈이 아닌 현실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과제를 수행하지 않은 채 수업이나 회의에 참석했는데 주최자가 시간이 다하도록 이를 언급하지 않을 때 당사자는 안도감을 느낀다. 이럴 때 제일 원망 받는 참석자는 굳이 ‘과제 검사 안 하느냐’고 손을 들어 묻는 사람이다. 그가 미운 이유는 과제를 잊은 당사자가 감점 등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을 높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과제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다수의 시선이 집중되는 껄끄러운 상황을 만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인성은 ‘비열한 거리’에 이어 ‘쌍화점’으로 유하 감독과 두 번째로 호흡을 맞췄다. [사진 제공=쇼박스]
우리가 가장 편하게 여기는 사람은 자신이 무언가를 갖고 있지 ‘않음에도’ 받아들여주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무언가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조차 못하는, 또는 인지하더라도 이를 내색하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네가 재산이, 큰 키가, 학벌이, 미모가 없지만 너를 좋아한다”고 표현하는 사람을 편한 친구나 파트너로 여기긴 힘들 것이다. 왜냐면 그는 적어도 상대방에게 무언가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특정 집단에서 편안함을 느끼기 위해서도 자신의 결핍으로 인해 느껴지는 이질감이 없어야 한다. 그 조직에 발을 들일 때마다 “당신은 비록 우리 모두가 가진 것을 지니고 있지 못하지만, 우리는 당신을 환영한다”고 느껴지게 하는 곳에서 환영 받는 느낌을 갖긴 힘들 것이다. 이미 내 결핍이 주목 받고 있다는 사실에 거북해지기 때문이다.

남자 배우 간의 키스 신은 이 영화가 나온 2008년 기준으로는 파격적이었다. 주진모는 당시 지상파 방송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키스 신 전 조인성과 위스키 반 병을 나눠 마셨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사진 제공=쇼박스]
홍림에게 건룡위는 딱히 자신의 결핍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집단이었던 것 같다. 한백이 굳이 언급하기 전까지는 홍림은 자신이 궁형을 당했다는 것 자체를 잊어버린 듯 행동한다. 그러다 한백이 그것을 대화의 주제로 끌어올린 순간 홍림은 실제 거세를 당하는 순간만큼이나 치욕스러운 듯한 표정을 짓는다. 조직의 모든 구성원이 자신의 결핍에 집중하게 됐을 때, 그는 그곳에서 예전만큼 편안하게 받아들여지기는 어렵게 됐다고 깨달았을 것이다.
홍림은 단 한 번도 왕을 사랑한 적이 없었을까. 왕의 질문에 홍림은 ‘없었다’고 대답하지만 하필 그 시점이 왕의 칼에 가슴을 찔린 직후라 진심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사진 제공=쇼박스]
소중하게 여긴다면 걱정에 신중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명절에 오가는 걱정을 불편하게 여기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친척의 걱정이란 보통 결핍에 대한 것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학벌, 직장, 애인, 배우자, 자녀, 부동산 등 상대가 아직 갖지 않은 것에 대해서 언제쯤 가질 예정이냐고 물으며 걱정한다. 순간 다른 친척들의 관심도 그가 가진 결핍에 집중된다. 그러나 이런 걱정이 큰 의미가 없는 이유는 본인에게 무언가가 없다는 사실을 그 자신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먼저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런 결핍이 화제로 오르는 상황을 유쾌하게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결핍에 대한 걱정은 그것을 진정으로 갖고 싶은데 못 가진 사람에게만 불쾌하게 다가가는 것은 아니다. 저런 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거나 가치관에 따라서 일부러 멀리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남이 이에 대해 걱정해주는 상황은 불편할 수 있다. 일단 그가 걱정을 입 밖으로 꺼냄으로 인해 상대방은 그가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학벌, 직장, 혼인 등) 무엇인지 인식하게 된다. 이어 그의 머릿속에서 자신은 그것을 갖추지 ‘못한’ 사람으로 인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저런 걱정은 단 한 번 입밖으로 꺼내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의 기분을 명절 내내 망칠 수 있다.

왕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었던 홍림은 영화 후반부엔 왕의 숨통을 끊으려는 사람으로 변한다. [사진 제공=쇼박스]
그렇기에 상대방의 결핍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당신이 그의 결핍을 근거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또는 무언가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걱정의 말을 건네는 순간 상대방이 당신에게 거리감을 느끼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백의 염려를 들은 홍림이 왕후를 구출하는 계획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한백을 예전처럼 아끼긴 힘들 것이다. 왜냐면 한백의 머릿속엔 자신이 여자를 행복하게 해줄 능력이 결핍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단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특히,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 대한 걱정을 입 밖으로 꺼낼 때 조심해야 한다. 애정에서 비롯된 당신의 걱정이 외려 그 사람을 밀어낼 수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
영화 ‘쌍화점’ 포스터. [사진 제공=쇼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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