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산성을 찾아서 [고구려사 명장면]
고구려인들은 자신 영역 곳곳에 수많은 산성을 축조하였다. 만주 지역에 역사를 펼쳤던 다른 종족집단은 대체로 산성을 축조하지 않았으니, 만주 땅에서 산성하면 바로 고구려를 떠올려도 좋다. 만주 중에서도 요동 지역은 산성의 분포 밀도가 더욱 높고 성의 규모나 형태의 다양성도 매우 풍부하다. 요동이 중국 세력과의 쟁패가 이루어지는 요충지역이기 때문이었다. 요동의 산성은 고구려가 생존을 위해, 나라의 존립을 위해 수, 당과 치열한 격전을 치룬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필자는 고구려 산성의 매력에 푹 빠져 오랫동안 고구려 산성을 탐방하였다. 아쉽게도 북한에 있는 산성 탐방은 불가능하니, 이른바 만주라고 불리우는 곳에 있는 고구려 산성을 찾아다녔다. 중국에 남은 고구려 산성의 수는 조사자들마다 다르지만 크고 작은 성을 모두 합하여 대략 150~200여 개 정도로 파악된다. 그중 필자는 70여 곳을 탐방하였는데, 각 산성마다 독특한 개성을 갖추고 있어서 절대 지루하지 않았다. 새로운 산성을 찾아갈 때마다 이번에는 어떤 모습일까, 또 어떤 새로운 걸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로 마음이 항상 들떠 있었다.
독자분들께 산성을 탐방하는 나름의 방식을 잠시 소개드린다. 먼저 산성의 정문을 찾는다. 아무래도 정문이 접근하기 쉬운 곳이니 당연하지만, 중국 땅에서 교통이 불편하고 정보가 제한된 궁벽지 곳에 있는 고구려 산성을 찾아다니다 보면 정문이 아닌 곳으로 접근하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산성의 정문은 대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여기서부터 출발하여 남아있는 성벽을 따라 한바퀴를 돈다. 성을 한바퀴 돌아야 잘보이지 않는 여러 산성의 시설이나 축조법, 산성의 구조 등을 배울 수 있다. 성벽이 무너진 곳에서는 안타까운 마음도 들지만, 한편으로 성벽의 축조 방식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무너진 곳이라도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성벽 위를 걸으며 계속 변화하는 성 안팎 경관을 바라보는 즐거움은 보너스이다. 이는 답사 중 사진을 찍을 때면 더욱 실감하게 된다. 가장 좋은 경관이지 싶어 사진을 찍고, 몇걸음 가면 더좋은 시점이 나타나서 찍고, 좀더 가면 또다른 시점이라 또 찍고 그래서 끊없이 사진이 쌓이게 된다. 요새는 디지털 사진이라 메모리만 충분하면 얼마든지 찍을 수 있지만, 전처럼 슬라이드 사진을 찍을 때에는 그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어 아끼고 아끼면서 찍어도 금새 필름 한통을 다했던 경험이 새삼스럽다.
고구려 산성을 답사하면서 항상 깨닫는 점은 산의 자연 지형을 잘 이용하여 성벽을 축조하는 안목이다. 고구려인이 평지성보다 주로 산성을 널리 축조한 이유는 절벽과 가파른 산등성이 등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여 성벽을 축조함으로써 공력을 적게 들이고도 성벽이 갖는 방어력을 보다 효과적으로 증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 산성의 입지를 보면, 산의 지형이 방어에 맞게 험준하면서도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접근성이 좋고, 동시에 성벽을 둘러 성을 구성할 수 있도록 폐쇄된 지형이며 또 가급적 능선으로 이어지지 않고 단독으로 돌출되거나 고립되어 있는 그런 지세가 선택되고 있다. 말이 그렇지 끝없이 이어져 있는 산세에서 딱 성을 만들기에 적합한 그런 곳을 찾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그렇게나 산성 답사를 다니면서도 잘 상상되지 않는다.
우리가 탐방을 다니는 산성은 이미 산성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능선이 낮은 곳은 높이 쌓고, 높은 곳은 깎아내며, 성안은 평탄하게 다듬고 하는 등 수많은 공력이 투입되어 성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성의 모습이 절로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성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그냥 흔하게 펼쳐져 있는 야산일 뿐이다. 그래서 고구려 산성을 답사다니다 보면 그 절묘한 지형의 선택에 제일 먼저 감탄하게 마련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앞서 소개한 고구려 도성이 자리잡았던 환인의 오녀산성과 집안의 환도산성을 보면 제 말뜻을 짐작할 수 있을 게다.
언젠가 필자는 고구려 산성에 올라 문득 이런 말을 떠올렸다. 진정한 조각가는 자신의 조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돌 속에 숨어있는 형상을 발견하여 그 형상을 드러낸다는 말이 있다. 예컨대 유명한 르네상스 시기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대리석 속에 갇힌 천사를 보았고, 그가 차가운 돌 속에서 풀려날 때까지 돌을 깎았다.” 적절한 비유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필자는 고구려 산성도 충분히 이런 비유쯤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고구려 산성은 축조하는 것이 아니라 산세가 갖고 있는 성곽을 발견하여 이를 구체화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고구려 산성은 군사적 방어시설이며, 평상시에는 지방통치의 거점성의 기능을 하였다.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성곽을 구축하였지만, 성 안팎을 연결하는 정문은 대체로 평지에서 진입이 용이한 위치에 있다. 그리고 성벽의 바깥 경사면은 가파른 지형이지만 성 내부의 경사면은 완만하여 여기에 계단식으로 대지를 구축하여 관청이나 주민들의 주거지를 마련하였다. 따라서 산성이라고 하더라고 평상시 행정적 기능을 수행하는 성곽으로서도 손색이 없다.
이렇게 산성이 지방통치의 치소로서 기능해도 어디까지나 주요한 기능은 군사적 방어에 있다. 그런 점에서 요동의 고구려 산성은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체계적인 국가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다. 요동지역의 지리적 형세를 보면 최전선에 요하가 있으며, 그 뒤편으로 평야지대가 펼쳐지고 그 뒤편에 천산산맥이 요동반도의 중앙부를 남북으로 가로지르고 있다. 천산산맥에서 발원하는 여러 지천들이 요하와 발해만, 또는 서해로 흘러들어가는데, 이 하천들이 교통로로 활용된다. 이들 교통로를 이용하여 천산산맥을 넘어야 압록강에 이르게 된다. 고구려는 이러한 요동의 지리적 형세를 이용하여 독특한 산성 방어망을 구축하였으며, 중국의 통일 제국의 강력한 군대를 막아냈던 것이다.
그래서 독자분들이 고구려 산성을 탐방하기에 적절한 곳이 고구려와 수, 당 사이에 전투가 치열했던 현장인 요동의 산성이라고 생각한다. 문헌으로 과거 그곳에서 벌어졌던 역사를 소략하지만 재구성할 수 있어 더욱 현장감이 넘치기 때문이다. 이제 요동의 고구려 산성을 탐방하는 하나의 일정을 소개해 드리겠다. 물론 요동에 남아있는 수십여 곳의 고구려 산성 어디인들 역사의 현장이 아닌 곳이 있겠냐만, 일정 등의 현실적인 제약이 있기 때문에, 그 중에서 역사서에 구체적으로 등장하는 저명한 고구려성 몇군데로 한정하는 것이 좋겠다. 그렇다면 신성, 요동성, 백암성, 안시성, 건안성, 비사성, 석성 등이 그 후보가 될 수 있다.
지난 회에서 고구려 국내성 즉 집안에서 주요 탐방지를 찾아보면서, 집안까지 오고가는 경로는 따로 소개하지 않았다. 고구려 산성 답사와 관련하여 함께 소개하겠다. 보통 중국 요령성 심양으로 들어가서 환인을 거쳐 집안으로 가게 되는데, 심양에서 환인 가는 길에 무순에 들려 고이산성을 둘러보는 게 일정상 바람직하다. 이 고이산성이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고구려 신성 바로 그곳이다. 앞서 120회에서도 언급했듯이 신성의 함락이 고구려 멸망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신성 탐방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그리고 환인의 오녀산성, 집안의 환도산성을 답사하면 일단 이 3곳만으로도 고구려 산성 탐방의 첫걸음을 떼는 셈이 된다. 집안에서 나올 때는 압록강변 길을 따라 단동으로 향하는 코스를 추천한다. 단동에는 고구려 박작성으로 비정되는 호산산성을 볼 수 있는데, 이곳은 이른바 중국의 동북공정이 실현되고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104회 참조)
단동에서 심양으로 향하는 길에 일정상 여유가 있으면 고구려 오골성으로 비정되는 봉성의 봉황산성을 들려도 좋다. 고구려 산성 중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으며, 주변 경관의 아름더움은 덤이다. 그리고 바쁘더라도 백암성으로 비정되는 등탑시 연주성은 꼭 둘러보기를 권한다. 눈으로 보기에 고구려 성벽의 장대한 모습을 실감할 수 있는 곳이다. 다만 92회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백암성은 고구려 산성을 대표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점은 기억하기 바란다. 대략 이런 몇몇 산성이 고구려 수도 환인과 집안을 들고 나며 탐방할 수 있는 산성 후보지이다.
요동의 고구려 산성을 주 대상으로 탐방하는 일정은 심양에서 시작하여 요녕성 대련에서 마무리하는 게 좋다. 심양에는 석대자산성이 있는데, 다양한 축성술을 보여주고 있는 산성이다. 주변 관광지와 연계되어 있는데 몇 년전까지만 해도 공식적으로 개방하지는 않았다. 심양 남쪽 요양시에는 저명한 요동성이 있었는데 성은 남아 있지 않지만, 추정지인 백탑 근처에서 수양제와 당태종 침공 때의 역사를 환기해보는 게 좋겠다(58회, 91회 참조)
요양시 남쪽 해성시에 있는 영성자산성은 안시성으로 비정되는 가장 유력한 산성이다. 안타깝게도 안시성은 현장 답사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중국측에서 한국인 탐방객들의 출입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물론 정치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도구화하는 중국측 태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우리측의 잘못 또한 없지 않다. 90년대에 한국인 탐방객들이 안시성에 가서 고구려의 승리를 한민족의 승리로 치환하는 언행들이 잦았던 면도 있다. 그런 점에서 역사를 잘못 현재화하는 그릇된 태도는 중국측이나 한국측이나 마찬가지이다. 요동의 고구려 산성을 탐방할 때 성찰해야할 면이다.
안시성을 멀리서 바라보고 아쉬운 마음을 안고 다음 행선지인 건안성으로 향한다. 건안성은 개주시 청석령향 고려성자산성에 비정되고 있다. 이곳도 아직 자유롭게 탐방할 수 있는 곳은 아니지만, 안시성처럼 출입이 통제되지는 않았다. 고구려 최전방 방어선에서 신성, 요동성에 버금가는 요충성답게 그 규모가 크고 장대하다.
건안성은 개주시에서 장하시로 천산산맥을 넘는 주요 교통로의 입구를 장악하고 있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고구려 주요 교통로 중의 하나를 탐방하는 목적으로 건안성에서 장하시로 향하는 일정이 좋다. 천산산맥이 어떤 지리적 분위기인지를 체험할 수 있다. 천산산맥을 넘어가는 도중에도 여러 고구려 성이 있지만, 아쉽게 그냥 지나쳐도 장하에는 매력적인 산성이 기다리고 있다.
고구려 석성에 비정되는 성산산성이다. 필자가 답사한 산성 중에 가장 아름다운 성의 하나로 꼽고 있는 곳이다. 근처에는 있는 후성산산성이 멀리 건너다 보인다.(83회 참조). 다만 20여년 전부터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일부 복원 구역이 중국식 성곽과 건물 모습을 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요즘 우리도 여기저기서 산성 복원을 하고 있는데, 좋은 타산지석이 된다.
장하시에서 요동반도 남단 길을 따라 대련으로 향하는데, 일정에 여유가 있으면 보란점시 성대향에 위패산성이란 대형 산성이 있는데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라 탐방해보기를 권한다. 일부 학자들은 고구려 적리성으로 비정하기도 한다.(104회 참조)
대련시에는 고구려 비사성에 비정되는 대흑산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중국에서 복원한 장대까지 차량으로 올라갈 수 있어서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장대에서 멀리 내다보면 발해만과 황해를 좌우로 모두 관망할 수 있어 비사성이 최고의 감시대 역할을 하였음을 실감하게 된다. 장대 주변의 성벽은 모두 고증없이 최근에 쌓은 것이기 때문에 눈길을 줄 필요도 없다. 본래의 성벽을 답사하기 위해서는 서문으로 들어가 서문지에서 오른쪽으로 성벽을 찾아 오르면 된다. 경사가 가파르고 지세가 험하기 때문에 이렇게 험준한 산성이 어떻게 함락되었는지 궁금할 지경이다.(90회 참조)
대략 이런 일정과 답사 경로이면 요동 지역 저명한 산성들을 탐방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수, 당과의 전쟁 때에 역사 기록이 있어서 역사의 한 장면을 떠올리면서 탐방할 수 있는 역사 현장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여기서 독자분들께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필자는 고구려 산성 사진 자료를 적잖게 갖고 있지만, 이번 회에서는 전혀 사진을 소개하지 않았다. 몇몇 장면 소개하는 게 오히려 고구려 산성의 이미지를 단순화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앞서 고구려 멸망과정을 짚어 보면서 말씀드렸듯이 고구려는 당과의 전쟁에서 군사력의 패배로 멸망한 것이 아니다. 내부의 분열과 배신으로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그동안 요동에서 숱한 피를 흘려가며 어렵사리 지켜왔던 나라가 최고위층의 무능과 탐욕으로 순식간에 무너졌던 것이다. 고구려 산성 탐방을 통해 배우고자 한 교훈의 하나는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요동의 고구려 산성 탐방은 나라를 어떻게 지키고 또 나라가 어떻게 망하는가에 대한 교훈을 얻는 탐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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