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저절로 움직여 ‘드리블, 골!’…‘계단식 성장’의 희열 [ESC]

한겨레 2022. 11. 2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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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하루운동]실전서 좀처럼 써먹지 못한 기본기
지독한 계단식 성장 끝에 드디어
근육에 아로새긴 무언가가 나왔다

짧은 풋살 인생 가운데, 가슴 속에 아주 소중히 품고 있는 나만의 명장면이 두 개 있다. 하나는 골문 앞까지 드리블해 페인팅으로 수비를 벗겨낸 후 골을 넣었던 것이고, 하나는 골로 이어지진 못했지만 사이드 라인을 타고 반 박자 빠르게 치고 달려 수비를 뚫고 골문 앞까지 내달렸던 순간. 이 두 장면은 모두 내 마음속에만 남았는데, 이유는 아무도 영상으로 남겨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흑….

특히 첫 번째 장면은 프레임 단위로 쪼개져 아주 또렷이 기억난다. 골대 왼쪽 사이드에서 공을 받아서 골대 쪽으로 툭툭 몰고 갔고, 압박해오는 수비수를 왼쪽으로 유도한 뒤 오른쪽으로 움직여 벗겨내고, 골키퍼와 일대일로 마주한 순간! 너무나도 선명하게 빈 공간이 보이는 바람에 마무리까지 완벽하게 해냈던 날! 영상으로 남아있지 않은 덕에 어쩌면 몇 배로 미화가 된, 내 가슴 속에만 남아있어 더 소중한 풋살 인생 최고의 명장면! 내가 이 장면을 이렇게 분명히 기억하는 이유는 뭘까.

벽을 넘어선 순간

생각해보면 단순히 잘해서 기억에 남는 것만은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늘지 않던 지점, 약점이라 여기는 부분이 한방에 격파되었던 순간이기 때문이다.

기본기 훈련을 할 때 나는 드리블이나 컨트롤을 꽤 하는 편이다. (양심상 ‘잘한다’라고는 못하겠다.) 콘 드리블의 속도나 정확도는 처음보다 제법 좋아졌고, 발바닥 컨트롤이나 보디 페인팅의 움직임도 그럴싸하게 해낸다. 풋살은 좁은 공간에서 이뤄지는 게임이라 작은 움직임과 컨트롤 하나로 상대를 벗겨내고 공간을 만드는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 이 기본적인 능력을 갖춰야 다음 플레이를 만들 수 있는데, 문제는 훈련에서 익힌 기본기를 실전에서 좀처럼 써먹지 못한다는 거다. 훈련할 때는 잘만 되던 간단한 드래그 동작과 페인팅도 실전에서 수비수를 앞에 두고는 마음먹은 대로 하지 못한다. 훈련 때에 비하면 반의반도 못 미치는 움직임이 나온달까.

또 다른 고민은 골 결정력이었다. 운 좋게 수비를 제치고 골문 앞까지 공을 끌고 가더라도 골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경험이 반복되다 보니 골문 앞에만 가면 생각이 많아진다. 어떤 타이밍에 어떻게 찰지(발등이냐, 인사이드냐, 코발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고민하는 사이 이미 공은 골키퍼의 손에 가 있다. 슈팅에 자신이 없고 시야도 넓지 못해서 다가오는 키퍼는 더 크게 느껴지고 몸은 굳어 골문 앞까지 가서 주춤거리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약점이라 생각되는 두 가지가 머릿속에 콕 박혀있다 보니 필드 위에서 자신감이 더 떨어지고, 해당 상황이 눈 앞에 펼쳐지면 생각이 많아지고 몸이 느려진다. 이래서 축구는 멘탈 싸움이라 했던가.

나약한 멘탈을 붙들고 답답한 마음에 투덜거리길 수개월. 어느 날 갑자기 드리블에 페인팅, 골까지 연결되는 완벽한 순간이 연출된 것이다! 그 순간 누군가 나를 완벽히 조종하는 듯 몸은 저절로 움직였고, 가야 할 길과 빈 공간이 천천히, 하지만 선명히 내 눈앞에 펼쳐졌다. 유레카! 이거잖아!

대개 성장의 과정을 그래프로 그리면 계단형 그래프가 된다고 말한다. 일정 기간 변화가 없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 한 계단 성장하고, 또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다가 한 계단 점프하는 식으로 말이다. 꾸준히 훈련에 참여하고 경기를 뛰지만 눈에 띄게 나아지는 게 없다고 생각할 때쯤 뼈와 근육에 아로새긴 무언가가 툭! 나오면서 한 단계 성장했음을 느낀다. 말뿐이 아니라 정말 그렇다. 어떤 벽을 껑충 뛰어넘은 듯한 희열. 지독한 계단식 성장의 희열이다.

이토록 순도 높은 성장의 경험을 하고 나니 어느 순간 삶의 과제처럼 느껴져 놓아버렸던 ‘성장’이란 단어가 매우 경쾌하게 느껴진다. 볼 컨트롤도 척척 해내고 멋진 페인팅으로 수비수도 제치고 골문 앞에서 발등에 착 얹히는 임팩트로 골을 넣는 모습. 내 이상향은 저 높은 곳에 있다. 하지만 결국 지금의 내가 해야 하는 것은 매 훈련에 성실히 임하는 것뿐이다.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연아 퀸의 말처럼.

그냥 하자, 서툰 나를 견디며

지난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국제 다큐멘터리 필름 페스티벌(IDFA)에 다녀왔다. 전 세계에서 모인 다큐멘터리 감독과 프로듀서들을 만났고, 영어 자막뿐인 다양한 국가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봤다. 바삐 돌아가는 세계 다큐멘터리 영화 산업 현장 한가운데에 있다는 게 감동적이었고, 많은 영감을 얻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 영어 실력으로는 멋진 감독들이 제작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주는 포럼을 100% 소화할 순 없었고, 그건 영어 자막뿐인 영화를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용기 내 찾아간 파티에서도 한계에 부딪혔다.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의 깊이가 깊어지는 데에 어려움이 컸다. “웨얼 아유 프롬?” 정도의 질문엔 쉽게 답할 수 있었지만, “그 영화의 어떤 점이 좋았어? 네가 만들고 싶은 영화는 어떤 거야?” 같은 질문엔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만큼 충분히 답할 수 없었다. 물론 어떤 질문은 한국말로도 답하기 어려웠지만…. 13시간을 날아 여기까지 왔는데 언어장벽에 막혀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상황이 정말 너무너무 아쉬웠다.

그날 밤 풋살팀 단톡방에서 시차도 없이 대화를 나누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매주 두 번 아무 생각 없이 운동장을 향했던 것처럼, 무엇이든 그렇게만 한다면 눈부신 계단식 성장을 맛볼 수 있지 않을까? 그저 오늘의 서툰 나를 견디며 조금씩 해나가다 보면 내 영어 실력도 어느 순간 한 계단 올라서는 순간을 맞이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영어 공부도 부담 없이 시작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새해부터, 아니 마음먹은 김에 12월부터 계단을 밟아보기로 한다.

글·사진 장은선 다큐멘터리 감독, 인스타그램 @futsallog에 풋살 성장기를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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