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와인] ‘인생의 전환점에서’ 알렉스 감발 생로망 블랑

유진우 기자 2022. 11. 26.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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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직진(直進)만 있지는 않다.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소설을 쓰기 전 위스키를 서빙하는 재즈카페를 운영했다. 와인업계에도 이전과 다른 삶을 살다 와인에 ‘인생 이모작’을 꿈꾸며 뛰어든 인물들이 무수히 많다.

이들 가운데 대다수가 집안이 와인업에 종사하고 있거나, 다른 산업으로 많은 돈을 벌어 와이너리를 인수하는 경우다. 온전히 맨 주먹으로 여생을 걸고 와인업계에 투신하는 늦깎이 와인메이커들은 여전히 보기 드물다.

특히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와인이 나는 프랑스 부르고뉴 지역에서 ‘와인 무지렁이’ 상태로 삶의 2막을 열어보려는 경우를 찾아보긴 더욱 어렵다.

와인을 단순 산업이 아니라 문화 유산으로 여기는 프랑스에서도 이 지역은 유난히 보수적이다. 부르고뉴와 쌍벽을 이루는 프랑스 와인 생산지 보르도에서는 ‘샤토’라 불리는 와이너리 하나가 많아야 한 손으로 꼽는 아들, 딸에게 상속된다. 예전부터 귀족 가문을 중심으로 소유권이 분명하게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르고뉴 지역은 다르다. 이 지역에서는 중세부터 수도사들이 와인 밭을 일궜다. 18세기 후반 귀족과 교회의 권력에 대항하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면서 수도원이 갖고 있던 모든 포도밭은 혁명정부에 몰수됐다. 이후 나폴레옹이 장자 중심 ‘균등상속법’을 강제하면서 이 지역 포도밭은 세대를 거듭할 수록 소유권이 복잡해졌다.

부르고뉴 지방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특급 포도밭 ‘코르통’은 소유주가 200명이 넘고, 국내에서도 유명한 본 로마네 마을 포도밭 ‘에세조’는 경복궁 하나 만한 면적 34만제곱미터 땅을 80명이 넘는 생산자가 나눠 갖고 있다.

알렉스 감발은 이런 보수적인 땅에 아무런 연고 없이 본인의 영역을 구축한 입지전적인 생산자다. 감발이라는 이름이 마치 프랑스 이름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그는 미국 국적 부동산 사업가로 40년 가까이 살았다.

그래픽=이은현

감발은 미국 동부 보스턴과 워싱턴DC 인근에서 부동산 개발 사업을 하면서 가끔 사무실 인근 와인가게에 들렀다. 1980년대 중반 무렵이었다. 꾸준하게 단골 가게에서 발행한 두 장짜리 소식지를 읽던 그는 점차 와인에 매료됐다.

감발이 서른다섯이던 1992년, 그는 운명같은 은인을 만났다. 프랑스 와인을 미국에 수출하던 부르고뉴 본(Beaune) 지역 와인 중개상 베키 웨이서먼(Becky Wasserman) 여사였다. 베키는 감발에게 ‘와인을 정말 좋아한다면 직접 만들어보라’고 끊임없이 설득했다.

감발은 부르고뉴 와인 전문지 ‘버그먼스’와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1년 정도 안식년을 갖고 이탈리아에서 아이들과 쉬면서 와인을 즐겨볼 생각이었다”며 “베키의 격려 덕에 부르고뉴 와인 학교에 들어갈 결심을 세웠다”고 말했다.

그는 1993년 본업이었던 부동산업을 완전히 정리하고 가족과 함께 부르고뉴에 발을 디뎠다. 그 어느 곳보다 보수적이라는 지역에 자리를 잡으면서 배수진을 친 셈이다.

고학생으로 와인 공부를 마치니 어느덧 감발은 마흔을 목전에 둔 무직자가 되어버렸다. 그는 1996년 다른 농부가 재배한 포도를 사들여 본인 이름을 건 첫 와인을 빚기 시작했다. 부동산업으로 벌어 놓은 돈이 있어도, 이 지역에 연고가 없는 미국인 감발에게 밭을 팔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첫해 생산량은 참나무통으로 60개 분량에 그쳤다.

첫 10년 동안은 밭을 사는 일보다 와인을 파는 일에 집중했다. 부르고뉴 생산자들은 그가 진득하고 선이 굵은 미국식 와인을 만들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는 누구보다 우아하고 맑은 부르고뉴식 와인을 추구했다.

10년 후인 2005년에는 나지막하게 쌓인 명성을 바탕으로 이름 없는 변두리였던 볼내(Volnay) 지역 밭뙤기를 처음으로 사들였다. 이렇게 또 10년이 흐르자 좀처럼 벽을 허물지 않던 부르고뉴 생산자들도 감발의 실력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외국인한테 절대 팔지 않는다’던 노른자위 밭들이 그의 손에 들어왔다. 감발이 2011년 매입한 바타르 몽라쉐 그랑크뤼(Batard Montrachet Grand cru) 밭은 세계 최고의 화이트 와인을 만드는 지역이다. 이 지역을 외국인이 사들인 사례는 그가 처음이다.

알렉스 감발 생로망 블랑은 그의 화이트 와인 양조 솜씨를 잘 보여주는 와인이다. 그는 2011년부터 직접 보유한 모든 포도밭에서 화학 비료를 쓰지 않는 순환농법(비오디나미·Biodynamie)으로 포도를 기른다.

이 와인은 부드러운 감칠 맛이 특징이다. 코에서는 잘 익은 과실향과 하얀 꽃, 버터 향기가, 입에서는 기름진 질감과 함께 신선한 산도가 균형감을 맞춰준다. 2022 대한민국주류대상 화이트와인 구대륙 6만~10만원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 수입사는 하이트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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