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 최고령 배우 이순재가 겪은 광복과 6·25

박돈규 기자 2022. 11. 26.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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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령 리어왕'에 이어 연극 '갈매기' 연출에 도전하는 원로 배우 이순재 /이태경 기자

현역 최고령 배우 이순재(88)를 지난 18일 인터뷰했다. 구순을 앞둔 이순재는 연말에 연극 ‘갈매기’(12월 21일부터 유니버설아트센터) 연출가 겸 배우로 관객을 만난다. 그야말로 노익장이다.

‘갈매기’는 안톤 체호프의 대표작. ‘벚꽃동산’ ‘세자매’ ‘바냐 아저씨’로도 유명한 러시아 극작가다. 이순재는 “체호프는 셰익스피어 못지않게 걸작을 많이 남겼는데 그동안 국내에서 공연된 ‘갈매기’는 연출자가 재해석을 하거나 원작을 훼손하는 형태가 대부분이라 안타까웠다”며 “명대사를 그대로 들려주고 싶어 내가 연출까지 맡았다”고 했다.

이순재는 우리 근현대사의 아카이브(archive·기록 보관소) 역할을 하는 배우다. 인터뷰 자리에서는 실제 인생사를 들려줬다. 광복 후 남대문시장과 비누, 6·25 전쟁 이야기는 이날 인터뷰 주제에서 벗어나고 지면 제약도 있어 싣지 못했다. 그 대목을 이곳에 옮긴다.

이순재가 연출하는 연극 '갈매기'. 이항나 소유진 오만석 주호성 김수로 강성진 이경실 고수희 등이 출연한다. /아크컴퍼니

–어디서 나고 자랐나.

“1934년 함북 회령에서 태어났다. 우리 씨족은 거의 다 그리로 귀양간 양반의 후예들이었다. 당시 이북에는 종가(宗家)만 남고 다들 만주 등으로 넘어가던 때였다. 내 부친도 연변 쪽에서 일하고 계셨다. 서울에 살던 조부모가 1년에 한번 자식들 순회를 했는데 마침 우리집에 들렀을 때 내 동생이 태어났다. 어린 나를 봐줄 여력이 안 되니까 할머니가 나를 서울로 데려가신 거다. 장남인 나만 그렇게 뚝 떨어져서 네 살 때부터 조부모와 살았다.”

–광복을 맞은 것은.

“서울 아현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일제 말기에 미군이 일본 본토를 폭격하기 시작하자 총독부가 경성(서울)에도 소개령을 내렸다. 이른바 ‘몸빼(통바지)’는 여자들이 방공 훈련할 때 입던 옷이었다. 물을 나르며 불 끄는 연습을 하곤 했다. 조부모를 따라 경기 가평으로 내려가 2년가량 살았다. 거기서 해방을 맞았다.”

–남대문시장에서 비누장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건 해방 후 서울로 돌아온 다음이다. 일제 때는 남대문시장이라는 게 없었다. 그쪽에는 일본 왕의 별궁이 있었고 충무로까지 일본 상권이 형성돼 있었다. 명동은 차이나타운이었고. 일본이 패망하자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폐허가 된 그 진흙바닥에 궤짝 놓고 장사를 한 게 남대문시장의 시작이다. 주먹 쓰는 건달들이 있어, 한 달은 버텨야 인정을 해줬다. 내 할아버지는 함경도 사투리 쓰는 영감님이라 봐준 모양이다.”

–비누장사는 어떻게 된 것인가.

“함경도 연안에는 명태와 정어리가 많이 잡혔다. 기름이 많은 어종이라 그 기름으로 비누와 비료를 만들었다. 흥남에 비누공장이 있었다. 해방 후 삼팔선이 고착화되기 전에는 비누 재고를 남대문시장에 갖다 놓고 물물교환처럼 판매한 거다. 할아버지가 비누장사를 시작했고 나중엔 내 아버지와 형제들이 월남해 이어받았다. 삼팔선이 막힌 다음에는 아버지가 일본 책을 보면서 수공업으로 비누를 제조해 팔았다.”

이순재가 연출하는 연극 '갈매기' 포스터

–그 무렵에 인생 목표는 뭐였나.

“그때는 연기 쪽은 생각도 못했다. 공부 잘해서 좋은 학교 가겠다는 게 목표였지, 특별한 건 없었다. 막연하지만 공부를 하다 보면 어떤 길이 보이겠지 정도였다. 내가 뭐 YS처럼 대통령을 꿈꾸지도 않았고(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순재의 서울대 철학과 선배다).”

–6·25 발발도 기억하는지.

“어느 일요일에 백화점에 갔는데 지프차가 돌아다니면서 ‘외출이나 휴가 나온 장병들은 속히 귀대하라!’고 아우성을 쳐댔다. 바로 그날 삼팔선에서 쳐내려온 거다. 이튿날 학교에 갔는데 비행기가 지상으로 사격을 하는 것을 봤다. 걸어서 충남 공주까지 피난을 갔는데 인민군은 벌써 금강을 넘었더라. 그만큼 진격이 빨랐다. 1950년에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라 분별력이 있었다.”

–특별한 일화라면.

“수복 후 서울로 돌아왔다가 1·4 후퇴 때는 구루마(손수레)에 비누를 싣고 꽁꽁 언 한강을 건넜다. 피난가는 길에 버려진 전쟁고아를 참 많이 봤다. 임자 없는 소가 왔다 갔다 하면 잡아먹기도 했다. 빈집이 많아 들어가서 자고 그랬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구루마가 없어졌다. 땔감으로 쓰려고 했는지 미군이 가져간 것을 내가 찾아왔다. 영어가 안 되니까 손짓 발짓 다 하면서(웃음). 구루마를 찾아오자 우리 할아버지가 할머니한테 자랑을 하셨다.”

–할아버지가 뭐라고 자랑하셨나.

“봐라! 애는 서울서 키워야 된다!”

이순재는 유쾌하게 웃었다. 피난시절 충남여고 예술제에서 연극을 보고 감명받았다는 그는 학생들을 모아 대본을 쓰고 연기를 독학하기 시작했다. 1956년 유진 오닐의 ‘지평선 너머’로 데뷔했다. 지성적인 이미지와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로 TV·영화·연극을 종횡무진하며 66년 동안 배우로 활약해 왔다. 권위를 내세우지 않아 젊은 세대에게도 진정한 어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순재는 우리 근현대사의 아카이브 역할을 하는 배우다 /김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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