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평한 지구를 믿는 사람들·기후변화 부정하는 트럼프···무엇이 그들의 눈을 가렸나[책과 삶]
리 매킨타이어 지음·노윤기 옮김|위즈덤하우스|456쪽|2만2000원
코로나19 위험성 부정한 트럼프
폐암 연관성 외면하는 담배회사
온난화 증거 무시하는 정유사
저자가 분석한 이들의 공통점은
지구 끝 절벽을 믿는 이들과 같다
2018년 11월, 철학자 리 매킨타이어는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의 한 호텔에서 열린 ‘평평한 지구 국제학회’에서 손뼉을 치고 소리를 지르는 600명의 사람들 틈에 앉아있었다. 하버드대와 보스턴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쳐온 매킨타이어는 물론 ‘평평한 지구론자’가 아니었다. 평평한 지구론자들이 내세우는 주장과 선전을 들으면서 그는 오래전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내세우며 홀로 느꼈을 외로운 심경을 짐작해보기도 한다.
그는 왜 그곳에 제 발로 걸어들어갔을까? 전작 <포스트트루스>에서 가짜뉴스 등 사실보다는 감정에 호소해 여론을 조성하는 ‘탈진실 시대’에 대해 고찰했던 그는 이제 과학 부정론자들의 생각을 바꿀 방법을 찾고자 한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나타났던 음모론과 마스크·백신 거부는 과학 부정론이 어떻게 사람들의 목숨과 안전에 악영향을 끼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줬다. 논평만 하고 있기엔 시간이 없었다. 그는 과학 부정론자들의 논증 방식을 알기 위해 학회에 참석했다. 왜 하필 평평한 지구론자들이냐고? “최악 가운데서도 최악을 고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그는 유튜브 동영상에 기반한 ‘과학적 근거’, 온갖 음모론, 자신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사실은 외면해버리는 방식, 엉터리 실험, 물리학과 기독교 근본주의교리가 비합리적으로 뒤섞인 논거들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과학적 증거를 펼쳐보이고, 논리의 오류를 짚기도 한다. 그중 한 사람과는 저녁식사를 함께하며 우호적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눈다. 지구가 진짜 평평한지 확인할 수 있도록 남극을 경유하는 비행기 노선에 함께 탑승해보자고 제안도 한다.(평평한 지구론자들은 남극 대륙은 실제 대륙이 아니며, 지구 둘레를 따라 세워져 있는 얼음벽이라고 설명한다.) 지성적이던 그는 제안을 수락하기 직전까지 가면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만, 결국엔 거절한다.
이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단 한 명의 과학 부정론자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라고 소개한 여성과 대화를 나누다 실마리를 찾는다. 물리학·화학, 심리학을 공부한 그녀는 이혼과 건강상 문제로 추정되는 인생의 위기 등 ‘트라우마’를 겪은 후 평평한 지구론을 접하게 됐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니 그녀처럼 과거에 상처받은 경험을 이야기한 평평한 지구론자들이 유독 많았다. 특히 9·11 테러가 그들의 상처였던 경우가 많았다.…자신의 삶에 밀고 들어와 모든 것에 의문을 품게 만든 사건이 되었다.”
저자는 평평한 지구론자 가운데 사회에서 소외되거나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이 많은 점을 발견한다. 소외감과 박탈감 속에 인생이 망가진 이유를 찾기 위해 음모론에 빠지게 됐고, 자신이 ‘진실을 아는 소수’에 속하게 됐다는 소속감을 갖는다. 평평한 지구론은 과학적 증거와 완전 무관했으며 “이들의 정체성 그 자체였다”. 과학적 사실을 알려준다고 한들 ‘믿음’이 변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학회에서의 경험을 통해 과학 부정론자를 존중하고, 이야기를 경청하며 신뢰를 쌓는 것이 변화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증명 경쟁에서 벗어나 개별적 인간으로 진지하게 대하면서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우선 스스로 무장을 해제해야 했다. 내 접근법에는 평평한 지구를 믿는 그들의 신념을 헤아리는 마음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믿음을 출발점으로 삼지만, 궁극의 목표는 그들이 왜 그런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말하도록 하는 일이었다.”
유리한 증거만 수집하는 ‘체리피킹’
위험보다 먼저 보이는 경제 이익에
굳건한 ‘믿음’은 쉽게 변하지 않아
팬데믹 위기 속 백신·마스크 거부
공동체 안전과 생명에 중대한 위협
진지한 대화 통해 설득해야
외면이야 말로 최악의 선택이니까
평평한 지구론은 ‘최악 중 최악’이지만 가장 ‘온건한 사례’이기도 하다. 평평한 지구론이 지구의 회전을 멈추지는 않기 때문이다. 기후변화 부정론, 백신 거부론 등 현실과 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과학 부정론은 기후위기를 가속화하고, 공동체의 안전에 위협이 된다. “수십만 명 자녀의 예방접종을 거부하고,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정책에 반대하고, 전염병이 퍼져 나가는 와중에도 총기를 소지하고 시위를 벌인다.”
저자는 이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믿음을 형성한 과정을 이해하고, 어떻게 하면 그 믿음을 바꿀 수 있는지 찾고자 한다. 책이 쓰인 당시는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던 시절로, 트럼프는 온실가스에 의한 기후변화를 부정하며 파리협약을 탈퇴하고 코로나19 바이러스 위험을 경시했다. 트럼프는 ‘과학 부정론자’였고, 대중들은 그를 미국의 지도자로 뽑았다. 책에는 이런 현상을 이해하고 변화시키고자 하는 절박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저자는 과학 부정론자들의 주요 전략을 소개한다. 유리한 증거만 수집하고 불리한 증거는 무시하는 ‘체리피킹’, 증거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어떤 이론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태도인 ‘음모론’, 검증되지 않거나 논리적 오류 투성이인 ‘가짜 전문가에 대한 의존’, 허수아비 논법(상대방 논리에서 약점을 찾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수법) 등 ‘비논리적 논증’, 완벽한 증거가 도출되기 전까지 믿을 수 없다고 우기는 ‘과학이 완벽해야 한다는 주장’ 등이다.
이 방법론을 제공한 것은 담배회사들이었다. 1950년대 미국에서 흡연과 폐암의 연관성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자, 담배 회사들은 막대한 돈을 투자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연구를 진행하고 이를 근거로 내세웠다. “의심은 우리의 제품이다”가 슬로건이었다. “과학 부정론은 명백히 기업의 이익에 기여하기 위해 생겨났다.” 이같은 방법론은 기후변화 부정, 백신 부정론 등에 청사진을 제공하며 ‘담배 전략’이라고 불렸다.
40년 후, 같은 일이 석유 회사들에 의해 재현된다. 엑손모빌, 셰브론, 쉘 오일 등이 결성한 미국석유협회는 1998년 ‘지구 기후과학 커뮤니케이션 행동’을 만든다. 이들이 싱크탱크를 매수하고 의심을 유포하는 일에 쓴 돈을 ‘다크 머니’라 한다. 하지만 엑손모빌은 1977년 이미 기후변화를 인지하고 있었으며,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전력을 짜내는 와중에도 북극 만년설이 녹을 경우 유전을 탐사할 계획을 세웠다.
‘다크 머니’가 뿌린 의심의 씨앗은 효과가 컸다. 과학자들의 97%가 기후변화는 진행 중이며, 인간 활동에 주된 책임이 있다는 데 동의한다. 지구온난화의 증거는 물리학에서 엄격한 검증 기준을 통과했음을 의미하는 ‘파이브 시그마’ 수준에서 ‘골드 스탠더드’에 도달했다. 우주의 기본 구성요소인 힉스입자 발견이 얻은 것과 같은 수준의 신뢰도다. 하지만 미국인 약 15%만이 기후변화에 대한 전문가 집단 합의가 90%를 초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저자는 기후변화 현실을 목격하기 위해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땅 몰디브로 떠난다. 몰디브의 수도 말레 옆에는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인공섬 훌루말레가 준설됐다. 섬 곳곳에서 그는 죽어버린 산호초와 무너져가는 지표면을 목격한다. 몰디브의 소년 선원은 “몰디브 바깥 사람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어 온실가스의 주범, 화석연료의 하나인 석탄 산업 종사자들을 찾아 나선다. 미국에서 세 번째로 석탄 생산량이 많은 펜실베이니아로 떠나 석탄 광부들을 만난다. 그는 광부들이 기후변화 부정론자일 거라 추측했지만, 그들은 기후변화를 부정하지 않았다. 환경문제에 대해 인식하고 있지만 삶의 터전과 생계가 모두 석탄과 이어져 있다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석탄 배출을 개선할 수 있는 조치들이 있지만 비용이 많이 든다. 기업은 이 비용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저자는 “석탄 광부들은 몰디브 배 위에서 만났던 아이들과 훨씬 공통점이 많은 것 같았다”고 말한다.
저자는 기후변화와 같은 긴급한 이슈에 있어서는 부정론자들의 비합리적 견해를 바꾸는 것보다 이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관심을 갖도록 하고, 투표와 같은 정치참여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도 사회적·정치적 변화를 위해서 대화와 신뢰를 형성하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과학 부정론이 기후변화와 예방접종, 팬데믹 시기의 마스크 착용 문제 등에 스며들이 반대 문화를 뒷받침하며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고 우려한다. 건조한 과학적 이슈가 당파적 대립구도 속에서 신념의 문제로 탈바꿈됐다. 과학 부정론이 ‘정치적 담론’이 된 것이다. 인지과학자 스테판 레반도프스키는 과학 부정론자의 대다수가 보수주의 정치 성향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또 기능적자기공명영상(fMRI) 스캐너로 분석한 결과, 자신의 신념을 위협하는 생각에 도출됐을 때, 진보주의자들보다 보수주의자들의 뇌에서 공포에 반응하는 편도체 부분이 더욱 활성화되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과학 부정론이 보수주의자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말한다. 유전자변형(GMO) 식품이 암을 유발하는 등 건강에 위험하다고 믿는 GMO 부정론자들 가운데엔 진보주의자들이 많다. 저자는 과학계에서 GMO 식품이 건강에 유해하다는 연구결과는 한 건도 없었다고 말한다.
책은 코로나19 팬데믹 한가운데에서 쓰였다. 코로나19 팬데믹은 과학 부정론의 가장 최신 사례다. 트럼프는 코로나바이러스 부정론자였다. “열이나 빛을 쬐거나 살균제를 주사하면 코로나19를 치료할 수 있다” “하이드록시클로로퀸(말라리아 치료제)을 치료제로 이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마스크를 거부했다. 저자는 “바이러스 부정론이 인명 손실의 위협에도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경제를 계속 개방해두려는 공화당 계획의 일부”라며 “백악관이 전반적으로 지휘하는 과학 부정론 캠페인을 목격하는 것은 매우 충격적”이었다고 말한다. 코로나19 부정론은 눈앞의 위험을 보면서도 정치적·경제적 이익을 위해 부정했다는 점에서 기후변화 부정론을 압축해 놓은 것 같았다. 저자는 기후변화 부정론을 가장 시급하고 위험한 부정론으로 지적하며, 코로나19 팬데믹을 교훈 삼아 대처해야 한다고 말한다.
미국 사례를 중심으로 서술돼 있지만, 윤석열 정부가 화석연료 감축 공약을 6개월 만에 백지화하는 등 기후변화 대응에 소극적인 한국에서도 저자의 이야기는 시사점이 있다. 한국 사회도 정치적 대립구도 속에서 정보를 취사 선택하며 확증편향을 더해가는 현상이 심화되고 있으며 각종 정치적 음모론이 판친다.
평평한 지구 학회에서 시작해 몰디브, 펜실베이니아를 거친 긴 논의 끝에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대화를 통한 신뢰와 공감을 형성하고 이들을 설득해야 한다는 원론이다. “몰디브의 어부와 펜실베이니아의 석탄 광부, 백신에 불안해하는 부모와 코로나 위기에 대응하는 의료 최전선 노동자”와 백신 거부자, 평평한 지구론자, 기후변화 부정론자 모두가 중요한 사회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외면하고 무시하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이 최악의 선택이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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