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N수학] 선택 공리가 만드는 역설

이채린 기자 2022. 11. 2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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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수학자 이언 스튜어트. 수학동아 DB

● 사전을 나눠라!

<하이퍼웹스터>는 영국의 수학자이자 과학 저술가인 이언 스튜어트가 사고 실험을 하기 위해 만든 상상 속의 사전입니다. 이 사전에는 가능한 모든 알파벳 문자열이 수록돼 있습니다. 사전은 A, AA, AAA, AAAA…와 같이 무한히 많은 A의 나열로 시작합니다. 이 다음에는 AAB, AABA, AABAA…와 같이 AAB로 시작하는 무한히 많은 문자열이 뒤따라옵니다. 사전의 맨 마지막에는 ZZZZZ…가 적혀 있습니다.

상상속 하이퍼웹스터 모습이에요. 수학동아 DB

그런데 이 사전의 편집장은 한 가지 고민이 있습니다. 바로 제작 비용 때문입니다. 사전의 내용이 너무 방대해 사전을 하나 제작하는 데 너무 많은 돈이 들어서입니다. 다행히도 편집장에게 비용을 줄이기 위한 묘수가 떠올랐으니, 바로 사전을 분권해 만드는 것입니다. 편집장은 A로 시작하는 문자열만 따로 모아서 <하이퍼웹스터 A 에디션>, B로 시작하는 문자열만 따로 모아서 <하이퍼웹스터 B 에디션>, 이런 식으로 <하이퍼웹스터 Z 에디션>까지 하나씩 출판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다 편집장은 더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습니다. <하이퍼웹스터 A 에디션>의 모든 문자열이 A로 시작한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미리 알려주고, 굳이 문자열 맨 앞의 A는 쓰지 않는 것입니다. 독자가 알아서 A를 넣어서 읽으면 되니까요. 예를 들어 <하이퍼웹스터 A 에디션>에 수록된 Apple를 pple로 바꿔 싣는다면 독자가 알아서 pple를 보고 Apple로 읽는다는 겁니다. 따라서 편집장은 비용을 줄이기 위해 <하이퍼웹스터 A 에디션>에서 맨 앞의 A를 생략한 <하이퍼웹스터 A 에디션 생략본>을 출판하기로 했습니다.

수학동아 DB

그런데 이렇게 되면 맨앞에 있는 A를 제거한 <하이퍼웹스터 A 에디션 생략본>에도 모든 단어가 수록됩니다. 문자열은 무한히 많기 때문입니다. <하이퍼웹스터 A 에디션 생략본>과 <하이퍼웹스터>는 동일한 책이 됩니다. 따라서 <하이퍼웹스터>를 A부터 Z까지 총 26권으로 분권한 뒤 각 에디션의 앞 글자를 생략하면 26개의 <하이퍼웹스터 생략본>이 만들어집니다. <하이퍼웹스터> 26개가 만들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편집장 입장에서는 횡재군요!

● 선택 공리가 만드는 신기한 현상

바나흐-타르스키 정리의 아이디어도 하이퍼웹스터 역설과 비슷합니다. 무한히 큰 사전을 분권해서 26개의 사전을 만들었듯이 무한히 많은 점으로 이뤄진 구를 쪼개서 두 개의 구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구를 이루는 각 점의 방향이 위쪽, 아래쪽, 오른쪽, 왼쪽, 중앙 중 무엇이냐에 따라 각각 구를 쪼개면, 마치 <하이퍼웹스터>처럼 구를 여러 개로 늘릴 수 있습니다.

단 이 과정에는 미묘한 문제점이 있습니다. 이 과정은 무한히 많은 대상 중 A로 시작하는 단어의 모임, 오른쪽 방향 점의 모임처럼 특정 대상의 모임을 골라내는 행위가 가능해야만 성립합니다. 현실적으로 이는 불가능합니다. 무한히 많은 대상 중 특정 대상만을 골라내는 작업은 무한히 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학의 세계에서는 이런 작업이 가능합니다. 바로 여러 집합의 모임이 주어졌을 때 각 집합에서 원소를 하나씩 선택할 수 있다는 ‘선택 공리’ 덕분입니다. 선택 공리에 의하면 주어진 무한히 많은 대상을 기준에 따라 분류할 수 있습니다. 선택 공리 없이는 바나흐-타르스키 정리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선택 공리가 있어야만 바나흐-타르스키 정리가 성립한다면 선택 공리를 인정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닐까요. 어떤 가정에서 도출해 낸 결론이 말도 안 된다면, 우리는 그 가정을 포기해야 합니다. 구가 두 개로 늘어나는 현상은 분명 이상하니까요. 바나흐-타르스키 정리는 선택 공리를 포기해야 할 충분한 근거처럼 보입니다.

● 유용한 선택 공리

하지만 선택 공리는 여전히 대부분의 수학자에게 공리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매우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선택 공리를 인정해야 어떤 두 집합의 크기는 서로 같거나, 한쪽이 더 크다는 사실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선택 공리를 인정하지 않을 경우 주어진 두 집합의 크기를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바나흐-타르스키 정리만큼이나 난처한 일입니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수학자는 선택 공리를 인정합니다.

20세기 수학계는 선택 공릴르 받아들일지 말지를 두고 숱한 논쟁을 벌였어요. 수학동아 DB

※관련기사

수학동아 11월, [역설 나라의 앨리스] 제 11장. 선택 공리가 만드는 역설

[이채린 기자 rini11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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