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결국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상상은 희망의 동력이 되지만, 어떤 상상은 절망의 표징이 되기도 한다.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JTBC)을 보다가 든 생각이다. 동명의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드라마는 재계 1위 재벌 순양의 충성스러운 노예로 살다가 죽임당한 윤현우(송중기)가 1987년의 순양 창업주 막내 손자 진도준(송중기)으로 회귀하여 살게 된다는 내용이다. 주인공이 특정 시기의 과거로 돌아가 ‘인생 2회차’를 살게 된다는 면에서 요즘 유행하는 ‘회귀물’의 일종이다.
몸은 11세가 되었지만 과거의 기억과 지식을 잃지 않은 윤현우는 자신이 순양의 4-2(넷째아들의 둘째아들을 지칭하는 순양 직원들이 사용하는 용어)의 몸으로 살게 되었다는 걸 빠르게 인지하고 그 상황을 기회로 삼는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이미 아는 진도준은 1987년 대선을 앞둔 시기에 어느 후보에게 후원할지 고민하는 회장에게 김대중과 김영삼 후보가 단일화에 실패할 것이라고 예언(!)하며 노태우 후보에게 후원금을 더 많이 보낼 것을 조언하여 회장의 신임을 얻는다. 회장의 신임을 얻은 그는 “옹기나 짓던 별 볼일 없는 땅”으로 취급되던 분당 대지 5만평을 증여받아 엄청난 시세차익을 얻고 서울대 법대에 수석 입학하는 등 성공적인 ‘인생 2회차’를 살게 된다. 그가 어떻게든 성공하려는 이유는 자신의 본체인 윤현우를 죽인 사람을 찾아서 복수하기 위해서다.
이런 회귀물은 과거로 돌아가 확실하게 성공하여 통쾌하게 복수하고 싶다는,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을 상상을 대신 실현해주기에 매력적이다. 또한 우리의 성공 욕망을 자극하는 면도 있다. 대중문화를 인간의 욕망과 사회의 현재를 비추는 거울로 본다면, 2022년의 회귀물은 우리의 현재를 어떻게 비추고 있는 걸까? <재벌집 막내아들>은 마피아 출신 변호사 ‘빈센조’가 사적 복수를 행하거나 <모범택시>(SBS) 속 ‘무지개 운수’ 사람들이 누군가를 대신해 악을 응징하는 ‘다크히어로물’과 다르고, 정의로운 변호사를 통해 억울한 약자를 돕고 사회문제를 공적으로 해결하여 정의를 구현하는 ‘법정물’과도 다르다. 또한 후회와 미련 때문에 과거로 돌아가 미제 사건을 해결하거나 현재의 소중함을 깨닫는 계기를 발견하는 기존의 회귀물과도 다르다.
수년 전부터 웹소설과 웹툰을 중심으로 유행하다가 TV 드라마로 확산된 2022년의 회귀물은 억울함과 그로 인한 좌절과 분노, 미래의 불가능성을 드러낸다는 면에서 사회적 절망을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어차피 이번 생은 망했으니 과거로 돌아가서라도 성공하여 자신을 모욕하거나 죽인 현실세계에 복수하고 싶다는, 서글픈 욕망이자 좌절된 절망이 투영된 것이다. 이전까지는 사적 복수를 해서라도 악을 응징하거나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사회적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랐다면 이제는 그런 바람마저 사치다.
윤현우가 순양 후계자의 지시로 해외에 은닉한 비자금을 찾으러 갔을 때 그것이 윤현우의 돈이라 오해한 은행 직원은 이렇게 질문한다. “젊은 나이에 이렇게 큰돈의 주인이 되었네요. 노력인가요, 행운인가요?” 노력이 좌절된 사회에서 성공하는 일이란 결국 ‘재벌집 막내아들’로 다시 태어나는 행운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된 것일까? 그 행운은 누구의 절망에서 비롯된 것일까?
오수경 자유기고가·<드라마의 말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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