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은 인정하고 권력에는 저항한다

채인택 2022. 11. 26.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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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어느 사상의 일생
자유주의-어느 사상의 일생
에드먼드 포셋 지음
신재성 옮김
글항아리

‘자유’라는 단어가 부쩍 자주 들린다. 하지만 자유의 본질과 근원, 그리고 역사적인 여정에 대한 깊은 연구는 찾기가 쉽지 않다. 자유나 자유주의가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정치 구호로 남용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영국 시사잡지 이코노미스트에서 30년간 기자로 일한 지은이는 자유주의에 대한 깊은 사유의 결과물을 내놨다. 자유의 역사와 철학, 그리고 정치학을 심층적으로 파고든다.

지은이에 따르면 자유주의는 종교개혁 이후 16~17세기의 종교전쟁, 그리고 1789년 프랑스 대혁명부터 1815년 나폴레옹의 몰락에 이르는 모진 시절을 경험한 뒤 발아되기 시작했다. 전쟁·혁명·사회변동으로 안정과 균형이 무너지고 불관용과 갈등, 테러와 대항 테러, 민중 소요, 보복적 탄압의 재발을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태동했다.

저자는 미국의 링컨, 영국의 글래드스턴, 독일의 리히터, 프랑스의 라블레를 자유주의 청년기(1830~1880)의 대표적 정치인으로 꼽는다. 라블레는 미국에 ‘자유의 여신상’을 선물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사진은 자유의 여신상 너머로 해가 지는 모습. [AP=연합뉴스]
이러한 탄생 배경에서 자유주의는 자유만큼이나 질서를 추구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신성한 권위나 기성의 전통, 그리고 편협한 전통에 의지하지 않는 자유로운 인간 존중의 윤리 질서를 원했다. 아울러 법으로 강제되는 위계나 특권 계급이 없는 사회, 전제 군주나 국가의 간섭과 독점적인 특권과 장벽이 없는 자유시장 질서를 함께 추구했다. 국제질서에선 무역이 전쟁보다 우세하고, 조약이 무력보다 앞서기를 바랐다. 이에 따라 권력·권위·독점에 대한 저항, 전쟁·빈곤·무지라는 인간 병폐를 고칠 수 있다는 신념, 그리고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의견에 대한 존중이 자유주의의 뼈대를 이뤘다.

지은이는 자유주의 이념을 갈등의 불가피성에 대한 인정, 권력에 대한 불신, 인간의 진보에 대한 믿음, 시민적 존중이라는 네 가지 문구로 정리한다. 자유주의자들에 따르면 인간 세상에서 이해관계와 신념 차이에 의한 갈등은 불가피하지만, 안정적인 정치 질서 안에서 제대로 관리하면 경쟁으로 전화돼 논의·실험·교류를 이끌 수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인간의 권력을 거부한다. 정치·경제·사회적으로 타인보다 우월한 힘은 저항에 부딪히거나 견제되지 않으면 독단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는 게 그들의 믿음이다. 그들에게 권력이란 시민에 대한 국가의, 빈자에 대한 부자의, 소수에 대한 다수의 횡포에 다름 아니다. 정치 철학의 영역에서 자유주의가 국민·사회의 동의 아래 합법적으로 행사되는 권력만 윤리적 정당성을 인정하는 사상으로 파악되는 이유다.

자유주의자들은 왕권신수설이나 피통치차의 동의를 받지 못한 권위주의 등과 대립하며 타파에 앞장서왔다. 자유주의자들이 전제군주제는 물론 소련 공산주의나 파시즘 같은 권위주의 체제, 그리고 자유무역으로 제국을 이룬 국가들의 식민주의에도 각각 반대한 배경이다.

또 진보가 시민과 사회를 덜 무질서하게 만들 것이라고 믿었다. 인간 능력의 무한함에 무게를 둔 독일 철학자 빌헬름 폰 훔볼트, 가치 있는 삶의 방식과 개별성의 증진을 강조한 영국 공리주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교육으로 진보를 이룰 수 있다고 믿고, 교육에 진보의 미래를 걸었다.

영국의 자유무역 옹호가인 리처드 코브던, 수요와 공급 곡선을 창안한 영국 경제학자 앨프리드 마셜, 프랑스 수리경제학자 레옹 발라스 등은 경제성장을 통한 번영의 확산이 진보라고 믿었다. 자기 계발과 도덕적 고양 같은 개인의 발전이나 사회적 병폐 해소와 공공복지 향상 등 정부의 역할로 진보를 이룰 수 있다고 믿은 자유주의자도 많았다. 이 중 복지 자본주의는 대서양 양안의 서구 국가에 자유주의와 인류 진보의 모델로 정착했다. 오늘날 누구나 당연한 것으로 믿는 사회 시스템이 자유주의자들의 오랜 투쟁 끝에 정착한 것이다.

시민적 존중이라는 자유주의자들의 사상은 국가와 사회가 개인이 어떤 사람이건, 어떤 생각을 하든 억압하거나 배제하지 않도록 하는 민주주의와 인권 전통의 바탕을 이뤘다. 권력이 사적 세계를 침해하거나, 재산권에 간섭하거나, 사람들의 의견에 재갈을 물리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저항의 대상이 됐다. 결국 시민적 존중은 압제적이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권력으로부터 확실한 보호를 제공하는 사회적 약속을 의미했다. 정부 기능은 최소화하고 시장 논리에 의지하는 방식으로 개인의 권리와 활동을 극대화하는 시스템이다.

자유주의자들은 교육과 문화로 합리적 시민이 양성되고 무역과 경제적 상호 의존으로 평화와 친선을 보장할 것으로 믿었지만, 역사는 희망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1880~1945년 유럽에선 인종차별, 반유대주의, 호전적 제국주의, 배타적 증오를 조장하는 무리가 선거를 통해 권력을 쥐었다. 파시즘의 득세는 전쟁으로 이어져 유럽은 피로 물들었다. 1930년대 대공황이 발생하자 자유주의자들은 더는 자유방임적인 시장과 자유무역을 주장할 수 없게 됐으며, 결국 대중과 타협했다.

냉전 시기에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와 결합하고 복지정책 등으로 경제 발전과 중산층 증가, 사회적 보호가 시너지를 이루면서 세계의 중심사상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경제적 불평등이 가중되고 비자유주의적이며 반민주적인 극단적 우파가 득세하면서 자유주의는 시련기에 접어들고 있다. 세계는 자유주의의 혁신을 기다린다. 원제 ‘Liberalism: The Life of an Idea’.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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