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서 ‘슬픔의 저항’ 손기정, 차별 반대 퍼포먼스 원조
한·일 체육철학자 대담
한·일 양국에서 손기정 관련 자료를 가장 많이 갖고 있는 데라시마 교수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시상식에서 손기정이 보인 태도가 미국의 블랙 파워 설루트(Black Power Salute)를 비롯한 스포츠계 차별반대 퍼포먼스의 기원”이라고 말했다.
강연 후 체육철학자인 김정효 서울대 교수가 데라시마 교수와 강의 주제를 토대로 대담을 나눴고 핵심 내용을 김 교수가 정리했다.
스포츠 존재 이유는 ‘경쟁을 통한 평화’
김정효 : 손기정과 남승룡의 퍼포먼스에서 미학을 발견한 사람도 있습니다. 베를린 올림픽 기록영화를 감독한 리펜슈탈(L. Ridfenstahl)은 “일본 선수들의 시상식은 감동적이었다. 그들은 월계관을 쓴 머리를 숙이고 종교적인 희열에 빠진 것 같은 모습으로 자국 국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라고 당시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승의 기쁨마저 극도로 절제하는 동양인 선수의 표정에서 종교적 희열을 끌어낸 감수성이 미학적이기는 하지만 손기정의 마음을 전혀 읽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슬픔의 저항’으로 표현할 수 있는 그의 메시지가 매우 보편적이어서 오늘날에도 큰 진폭을 갖지 않나 생각합니다.
데라시마 : 맞아요. 그런 저항의 정신이 아이티계 일본인 테니스 선수 오사카 나오미(전 세계랭킹 1위)에게도 전해졌습니다. 인종적 편견과 차별에 맞선 그의 말과 행동은 손기정의 시상식 장면에서 시작된 흐름이라고 볼 수 있거든요. 요컨대 손기정은 올림픽에서 저항적 퍼포먼스를 시작한 원점이라고 볼 수 있고, 그것이 올림피언 손기정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데라시마 : 그게 올림픽 정신에 더욱 합당하지요. 내가 손기정에 주목한 이유도 그의 퍼포먼스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저항의 정신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의 나라를 강제로 통합해 착취하고 피지배인의 신체마저 식민지 본국을 위해 이용하는 제국주의는 결코 용납될 수 없습니다. 손기정은 그 부당함을 온몸으로 표현한 것이지요.
김정효 : 스포츠가 인류에게 필요한 이유도 경쟁을 통한 평화입니다. 손기정을 기리는 마라톤 대회의 이름이 ‘손기정 평화마라톤’인 이유도 거기 있을 겁니다. 스포츠와 평화에 대한 교수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지구환경 보호 메시지 내는 것도 좋아
김정효 : 2020년 미국에서 비무장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의 가혹행위로 목숨을 잃으면서 촉발된 ‘블랙 라이브즈 매터(black lives matter)’운동은 이제 유럽 프로축구에서는 경기 전 당연한 퍼포먼스처럼 여겨집니다. 이를 통해 인권 문제를 환기하고 행동을 이끌어 내는 건 스포츠가 가진 파워라고 생각합니다.
데라시마 : 오사카 나오미가 마스크에 인종차별 희생자 이름을 새긴 자체만으로 큰 저항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하지만 스포츠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긍정적인 가치입니다. 그 행위의 기점에 손기정이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김정효 : 맞습니다. 스포츠가 신체적 퍼포먼스를 넘어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를 전달하는 매개가 된다면 앞으로 메가 스포츠 이벤트에서 이런 행위는 금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개인적인 바람은 지구의 환경운동을 위한 작은 퍼포먼스가 등장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데라시마 : 아주 좋은 의견입니다. 스포츠를 통한 평화! 그것이 손기정 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차별에 대한 저항은 손기정에서 시작되어 지금까지도 여전히 바통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스포츠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움직임은 손기정에서 시작해 ‘블랙 파워 설루트’를 거쳐 오사카 나오미까지 면면히 흐르고 있습니다.
■ 손기정 친일 연설은 총독부·경찰 협박 때문…“가장 처참한 일”
「 대담 말미에 김정효 교수가 손기정의 친일 행적에 대한 질문을 했다. 태평양전쟁 당시 어린 학생들에게 ‘학도의용병’으로 나갈 것을 독려하는 연설을 했다는 점이다. 이 질문에 데라시마 교수는 당혹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약간 톤이 올라가면서 단호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역사적 상황이나 조건을 보지 않고 행위만 평가하면 손기정에게 그보다 불쌍한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총독부가 등 뒤에서 총을 겨누고 연설을 종용하는데 어찌 아니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때 손기정은 조선총독부와 경찰에 철저히 이용당한 겁니다. 생전에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손기정은 저에게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처참한 일이 학생들 앞에서의 연설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일본의 영광을 위해 손기정이 그런 연설에 동원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일본의 니혼TV는 면밀한 취재 끝에 손기정의 연설이 총독부와 경찰의 협박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고증하였습니다. 그것은 손기정의 정신과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였습니다.
」
김정효 서울대 교수(체육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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