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주맹증’ 침술사의 사투, 조선왕조 미제 사건 스릴러

유주현 2022. 11. 26.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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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영화 ‘올빼미’ 안태진 감독
인조실록에 기록된 역사에 주맹증에 걸린 목격자라는 허구의 소재를 접목한 스릴러 영화 ‘올빼미’를 연출한 안태진 감독. ‘왕의 남자’(2005) 조감독 이후 17년만에 장편 상업영화에 데뷔해 화제다. 최영재 기자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 일곱 구멍에서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幎目)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변 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인조실록 23년 6월 27일

23일 개봉한 화제의 영화 ‘올빼미’의 모티브가 된 조선왕조실록의 한 구절이다. 앞뒤로 인조가 장남 소현세자와 그 가족을 죽일 만큼 미워했다는 역사적 맥락이 있을 뿐이다. 이 ‘영구 미제 사건’을 ‘주맹증’(빛이 없어야 보이는 시각장애)을 가진 침술사(류준열)와 자리가 불안한 왕(유해진)의 대결이라는 기발한 상상력으로 해결한 짜릿한 스릴러가 ‘올빼미’다. 2시간을 마법처럼 ‘순삭’시키는 잘빠진 오락영화지만, ‘진실을 목격한 인간의 선택’이라는 묵직한 사회고발적 주제도 던지며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고 있다.

주맹증을 소재 삼은 최초의 영화, 장르 중의 장르 ‘목격자 스릴러’, 배우 류준열의 첫 맹인 도전과 무려 ‘왕’이 된 유해진…. ‘올빼미’는 화제성 키워드 투성이지만, 신인감독 안태진(50)의 이름 석자가 가장 핫한 키워드다. 천만영화 ‘왕의 남자’(2005) 조감독 이후 무려 17년 만에 장편 상업영화에 입봉한 것이다. ‘보고도 못본 척’ 살아온 소시민이 불의를 목격하고 진실을 밝히는 히어로가 되는 하룻밤 사투를 박진감 넘치게, 디테일한 감각까지 섬세하게 그려낸 완성도가 17년의 와신상담을 웅변한다.

영화평론가 오동진은 그를 “영화계가 신뢰하는 히든카드”라고 소개했고, 첫 촬영 날 슬레이트를 쳐주러 담양까지 다녀왔다는 ‘왕의 남자’ 이준익 감독도 “그냥 영화 한 편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걸고 꿈을 실현시킨 눈물겨운 결과물”이라며 감격을 전했다. 정작 본인은 담담했다. 그간 10여 편의 영화가 엎어졌지만 “매일 똑같이 준비하다보니 17년이 흘렀을 뿐”이라며 “엎어지면 다음 작품을 구상했고, ‘올빼미’도 그런 작업들이 쌓인 결과”라고 했다.

“장르영화를 워낙 좋아해요. 주맹증이라는 아이템은 4년 전 제안받았는데, 그 6개월 전쯤 시각장애인이 주인공인 목격자 스릴러를 트리트먼트까지 썼었거든요. 그래서 재밌게 쓸 수 있겠다 싶었고, 예전 작업에서 이야기 원형을 많이 가져왔죠. 이번에도 정말 아슬아슬하게 들어가긴 했어요. 1년 반쯤 시나리오를 쓰고 나니 코로나 시국이 되서 투자시장이 엄청 위축됐으니까요. 당시엔 들어가는 영화가 거의 없었죠.”

코믹 연기 달인 유해진, 왕 역할 화제

영화 '올빼미'에서 시각장애인역할에 도전한 배우 류준열. [사진 씨제스엔터테인먼트]
‘주맹증에 걸린 주인공이 궁에서 뭔가를 목격한다’. 그에게 주어진 아이템은 이게 전부였다. 왜 인조실록이었을까. “조선왕조실록, 의문스런 사건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해봤더니 인조실록이 떴어요. ‘마치 약물에 중독된 것 같았다’라는 문장에서 그걸 기록한 사관이 품은 의심이 읽혔어요. 실록이 정말 재밌더군요. 인조가 몇월 몇일에 뭘 먹었고, 신하들과의 대화까지 디테일하게 적힌 것이 마치 타블로이드를 보는 느낌이었죠. 사관은 왜 의심이 들었을까, 그런 호기심을 깔고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빛이 있으면 보이지 않고 빛이 없으면 희미하게 보인다는 ‘주맹증’이란 의미심장한 은유로 와닿는다. 백주대낮에 뻔뻔하게 자행되는 불의를 ‘눈뜬 장님’처럼 못본 척 하루하루 살아가는 인간의 속성 그 자체 같아서다. “주제는 소재를 따라오는 것 같아요. 그저 쫄깃한 스릴러 한편을 만드는 게 목표였지만, 시나리오를 쓰다 보니 진실을 목격했을 때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다 싶더군요. 의식하진 않았어도 평소에 제 안에 그런 생각이 있었겠죠.”

주맹증이 쉬운 소재는 아니었다.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경수 역 류준열과 함께 실제 환자를 수소문해 만나야 했고, 야외 장면은 밤을 새며 찍어야 했다. 평소 초저녁부터 잠을 잔다는 류준열에겐 고역이었을 터다. “9시쯤 되면 기운 없어 하다가도 슛 들어가면 말짱해지더군요.(웃음) 영화를 이끌어 나갈 줄 아는 똑똑한 배우라 느꼈어요. 배우는 자기 역할에 갇히기 쉬운 법인데, 스태프, 보조출연자까지 챙기며 현장 분위기를 끌고 가는 모습이 주인공답다 싶었습니다.”

영화 '올빼미'에서 왕 역할에 도전한 배우 유해진. [사진 씨제스엔터테인먼트]
유해진의 연기변신도 관전포인트다. 코믹 연기의 달인이자 개성파 배우인 그가 ‘외모 빼고 볼게 없었다’고 전해지는 인조 역을 맡은 것이다. “실록에선 외모 얘기를 못봤어요(웃음). 개성적인 외모는 양면성이 있죠. 한계가 될 수도 있지만, 그걸 넘어서서 이용할 때 새로운 게 나오잖아요. 처음부터 근엄한 왕이 아니라 의심하며 문틈을 엿보는 인간적인 왕을 그리면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어요. 유해진 배우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드릴 수 있게 돼서 기분 좋습니다.”

“치밀·정교·섬세한 스타일이라 ‘왕의 남자’ 때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나의 허술한 부분을 잘 채워줬다”는 이준익 감독의 말처럼, 과연 그는 완벽주의자였다. 시나리오를 100번 넘게 고친 장면도 있고, 가장 충격적인 세자 독살 씬은 촬영장에서 세자 역 김성철 배우가 두손 두발 다 들었다는 후문이다. “제대로 충격을 주고 싶었어요. 이틀 반을 잡고 찍었는데, 김성철 배우가 고생했죠. 침을 놓는 인조 피부를 특수 본드로 6~7시간 걸려 붙이고 하루 종일 있어야 하니 피부가 호흡을 못하잖아요. 막판엔 ‘더 이상 못하겠다’고 했었는데, 찍고 나서 부족한 게 보이는 거예요. 김성철 배우에게 용서를 구하고 결국 하루 더 찍었죠. 다행히 그 장면 반응이 좋아서 보람을 느낍니다.”

그런데 정작 가장 디테일한 부분에서 이준익 감독의 조언을 따랐단다. 수염 분장 얘기다. “경수의 수염이 고민이었어요. 류준열 배우에게 수염이 낯설다는 게 중론이었거든요. 그래서 떼기로 했는데, 첫 촬영날 이준익 감독님이 슬레이트 치러 와서 딱 보시더니 ‘왜 수염을 안 붙였냐, 그 당시엔 다 수염을 길렀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때부터 다시 뗐다 붙였다 고민이 시작됐죠. 결국 붙인 게 신의 한수였어요. 류준열이 아니라 경수로 보이니까요.”

이준익 “인생 전체 걸고 꿈 실현 결과물”

‘올빼미’는 스릴러 장르지만, 역사에 상상력을 보탠 팩션 사극이라는 점에서 이준익의 계보를 이었다 할 만하다. ‘왕의 남자’ 뿐 아니라 ‘황산벌’‘사도’ 등, 힘센 자들의 기록인 역사를 비주류 혹은 아래로부터의 시선으로 보게 한 이준익처럼, 그 역시 실록에서 약자의 의심이 담긴 구절을 찾아내 그 시선을 그대로 확장시켰기 때문이다. “이준익 감독님께 사극을 대하는 태도를 배웠어요. 상상력을 더해 영화를 만들지만 실제 인물을 다루는 만큼 맥락은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죠. 약자에 대한 공감능력은 훔치고 싶은 부분이고요. 영화 이전에 세상을 그런 눈으로 보시거든요. 늘 닮고 싶었는데, 제 영화에도 반영됐다면 좋겠네요.”

‘17년만의 데뷔’로 화제가 됐지만, 영화감독을 꿈꾼 지는 35년이 됐다. 중3이던 1987년 영화 ‘백투더퓨처’의 “재미있는 세계에 빠져든” 이후 한 번도 다른 꿈을 꾸지 않았다. 늘 스스로를 의심하고 우울증을 견뎌온 17년이지만, 포기하지 않은 건 “아무 말 없이 기다려준 아내 덕”이란다. “‘올빼미’를 만나기 전에 많이 우울했어요. 나는 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고 할 수 있을까를 한 번도 생각 안 해봤구나. 그런데 다른 재주도 없더군요. 정말 너무 우울해서 한참 고민하다 병원을 갔는데, 대기 환자가 몇십명인 거예요. 간호사가 제가 초진인 걸 알고 한숨을 크게 쉬더군요. 초진은 상담 시간이 길어지니까요. 우울한 사람이 정말 많다는 걸 알았고, 간호사분이 저보다 더 힘들어 보여 그냥 돌아 나왔어요. 우울할 때마다 그분 얼굴이 떠올라 왠지 계속 열심히 해야 될 것 같았습니다.(웃음)”

17년 만에 밟은 현장은 딴 세상이었다. 한국 영화계가 세계 정상급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이 피부로 와닿았다. “현장이 엄청나게 빨라졌어요. 필름이 디지털로 바뀐 것도 있지만, 스태프들의 전문성이 다르더군요. 가장 큰 이유는 임금이 정상화됐기 때문이죠. 숙련된 스태프들이 꾸준히 일할 수 있으니까요. 예전엔 감독이 일당백을 해야 했다면, 이젠 감독의 몫만 하면 나머지는 다 알아서 돌아가요. 오랜만에 현장에 갔으니, 딱 저만 잘하면 되겠더군요.”

그 사이 달라진 건 또 있다. OTT 세상이 되면서 극장 개봉 영화의 화제성이 예전 같지 않다. ‘박스오피스 1위’라지만 파이 자체가 작아 갈 길이 멀단다. 시각장애 주인공의 감각을 따라가기 위해 앰비언스 사운드 디자인까지 동원한 ‘오감충족 영화’인 만큼 극장에서 봐야 스릴을 만끽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17년이건 35년이건, 영화에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두 시간 동안 다른 세계에 푹 빠졌다 나오는 짜릿한 경험”일 터. ‘올빼미’에 제대로 빠져들려면 극장 나들이를 해야 할 것 같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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