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강남시대’ 주역 광림교회 김선도 목사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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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신자 150명 교회 맡아 세계적 감리교회로 키운 목회자
서울 광림교회 김선도(92) 원로목사가 25일 새벽 별세했다. 김 목사는 한국 감리교를 대표하는 목회자이자 개신교의 ‘강남 시대’를 연 주역 중의 한 명이다.
1930년 평북 선천의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난 김 목사는 원래 의학도였다. 광복 후 공산 치하 북한에서 신의주 의전(醫專)과 해주 의전에서 공부한 그는 6·25 때 인민군 군의관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 후 퇴각하는 대열에서 탈출해 국군 군의관으로 참전했다 전역했다. 그는 인민군에서 탈출한 상황에 대해 “불과 5분 만에 인민군 군의관에서 국군 의무관이 됐다. ‘5분의 기적’이었다”고 회고했다. 이후 전쟁 중에 다시 입대해 육군 종군 경찰병원 소속 의사로 활동했고, 감리교신학대를 졸업하고 목사가 된 후에는 공군 군목(軍牧)으로 입대해 9년간 근무했다. 군목 시절 부대 인근의 허물어져 가는 마을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박봉을 쪼개느라 김 목사 가족은 1년간 칼국수만 먹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군목 시절부터 명설교자로 이름을 얻은 그는 1971년 전역 후 서울 중구 쌍림동에 있던 광림교회의 제5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당시 신자는 150명 정도였다. 김 목사 부임 이후 교세는 급성장했고, 1970년대 서울 강남이 개발되자 1979년 당시 배나무밭이었던 강남 신사동에 새 예배당을 지어 이전하면서 개신교계의 강남 시대를 선도했으며 현재 등록 교인 10만명의 세계적 감리교회로 성장시켰다.
강남 이전 후 김 목사는 교회 시설을 민방위 교육 장소로 제공하고 스스로 강사로 써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민방위 교육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여러분 안에는 아직 쓰지 않고 남아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강조했고, 그의 강의를 들은 참가자들이 가족과 함께 대거 교인으로 등록해 광림교회 부흥의 밑거름이 됐다.
1986년 광림복지재단을 설립해 사회복지사업에 앞장섰고, 사할린 동포의 영구 귀국을 도와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공산권 국가를 비롯한 해외 선교에도 관심을 기울여 러시아·에스토니아·몽골·베트남·튀르키예(터키)·잠비아·짐바브웨 등에 선교센터를 설립했다. 신사동 교회 옆 사회선교관 7층 1000석 규모 BBCH홀은 대형 뮤지컬 등의 공연장으로도 쓰이고 있다.
1994~1996년 기독교대한감리회(감리교) 감독회장(교단장), 1996~2000년 세계감리교협의회(WMC) 회장을 지냈다. 서울 종교교회 최이우 목사, 경기 성남 선한목자교회 유기성 목사 등 현재 한국 감리교를 대표하는 목회자들이 광림교회 부목사 출신이다. 금란교회 고(故) 김홍도 목사, 임마누엘교회 김국도 원로목사가 그의 동생이다.
김 목사의 장례는 기독교대한감리회장으로 마련되며 장례 예배는 28일 오전 9시 30분 광림교회 대예배실에서 진행된다. 장지는 경기 광주 오포읍 광림수도원. (02)2056-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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