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돼지 요리’ 대소동…환경·노동·동물권을 둘러싼 ‘웃픈 이중성’[그림책]

손버들 기자 입력 2022. 11. 25.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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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저녁
권정민 글·그림
창비 | 44쪽 | 1만5000원

휴대전화를 켠다. 배달 앱을 연다. 음식을 고른다. 집 앞에 놓인 음식을 먹는다.

앞서 나열한 네 문장은 우리의 일상이다. 몇 번의 ‘손가락질’이면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간편하게 먹을 수 있다.

여느 날처럼 족발, 돈가스, 감자탕, 보쌈, 김치찌개를 시킨 아파트 주민들에게 돼지 한 마리가 배달된다. 주민들은 기겁한다. “돼지를 왜?” 주문이 너무 밀려 배달에 투입된 식당 사장이 재료를 손질할 시간도 없으니 직접 해먹으라고 살아있는 돼지를 보낸 것이다. 주민들은 일단 돼지를 숨긴다.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집값이 떨어질 수 있으니까. ‘요리도 안 된 저녁’을 받은 이들은 비상대책회의를 열고 돼지를 요리할 계획안을 만든다.

주민들이 계획한 돼지를 요리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1 씻는다. 2 잡는다. 3 나눈다. 4 굽는다. 씻을 때 필요한 도구로 천연모 세척솔과 비건 인증 세제를 정하고, 잡는 일을 맡길 전문가는 단기 아르바이트로 구하고, 부위별로 나눌 때 쓸 전문가용 칼들과 구울 때 사용할 바비큐 그릴과 각종 소스, 유기농 채소를 준비하기로 한다. 재료와 도구의 세계는 넓고도 깊어서 배고픔도 잊고 두 눈이 벌게지도록 검색에 열중한다. 모든 물건은 동이 트기 전에 도착하고 바비큐 파티를 할 생각에 들뜬 이들은 누구도 돼지를 챙기지 않는다. 주민들이 피운 숯에서 불길이 솟아오르자 화재 감식 스프링클러가 작동하고 파티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그사이 돼지는 사라져버린다.

권정민 작가는 다수자를 관찰 대상으로 전복하며 편의와 속도 이면에 숨은 환경·노동·동물권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돼지를 요리하겠다는 사람들이 비건 세제와 유기농 채소를 찾고, 직접 잡는 일은 꺼리며 도축 전문가를 단기로 고용하는 모습은 그럴싸해 보이는 유행에 편승해 본질을 간과하는 현대인의 이중성을 유머러스하게 꼬집는다. 배달 기사들로 꽉 찬 엘리베이터 장면은 플랫폼이 지배한 노동시장과 기울어진 배달 수익 분배 구조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 돼지를 끌고 가는 경비원과 뒷정리를 하는 청소원은 컷 밖으로 밀려나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직업군임에도 쉽게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는 비정한 사회를 표현한다. 정작 돼지를 요리하는 일은 하지 않고 파티를 할 생각에만 빠지다 느닷없이 물세례를 맞는 주민들에게서는 과정의 어려움에는 뒷짐을 지고 결과의 열매만 먹으려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발견한다. 책은 수북이 쌓인 플라스틱 용기 더미로 끝을 맺는다.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가는 우리. 쌓여가는 배달 상자와 일회용 플라스틱을 보면서 지나치게 한쪽으로 휩쓸려가는 일상에 균열을 내본다”라는 작가의 말이 따끔하게 들려온다.

손버들 기자 willow@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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