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家 들여다보기

최이현 기자 2022. 11. 25.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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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뉴스]

이혜정 앵커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사를 알면 이 전시를 더욱 재미있게 즐길 수 있습니다. 


한국외대 라영균 교수님 오셨습니다, 안녕하세요.


라영균 교수 / 한국외대 

네, 안녕하세요.


이혜정 앵커 

먼저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좀 부탁드립니다.


라영균 교수 / 한국외대 

600년 합스부르크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중요한 사건 위주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합스부르크는 유럽 역사에서 막강한 세력으로 이름을 떨친 가문 중의 한 가문이죠. 


그래서 이 가문은, 처음부터 그렇게 권문세가가 아니었고 그 스위스 북부 지방에 아주 작은 영지를 갖고 있는 백작에 불과했는데, 1273년 갑자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이 되면서 유럽에서 영향력 있는 가문으로 등장하게 되죠. 


그러다가 15세기, 어느 정도 텀이 있다가 15세기 들어서 다시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로 등극을 하게 되면서 결혼 정책과 동맹을 통해서 영토를 많이 확장해 나가죠. 


그래서 16세기에 칼이 5세 때는 스페인,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그리고 신대륙의 식민지 영토까지 막강한 영토를 갖게 되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되게 됩니다. 


칼 5세가 물러난 후에는 합스부르크 제국은 오스트리아계와 스페인계로 분리가 되면 됐고, 스페인계는 한 200년 정도 스페인을 지배하고 왕조로 넘기게 됐는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 지속되는데, 19세기는 합스부르크가 서서히 세력하는 그런 과정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탈리아 해방전쟁에서 오스테라가 계속 패배하면서 이탈리아의 많은 영토를 상실하고 그다음에 독일에서의 패권전쟁 프로이센과의 패권전쟁에서도 패배하면서 독일 통일에 완전히 배제가 되죠. 


그 궁여지책으로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중제국을 개편해서 재기의 어떤 노력을 하지만 쉽지 않았던 일이었고요. 


이 합스부르크 가의 불운이 계속 지속되던 가운데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에 가서 암살이 됩니다. 


이것이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고 여기에서 이 합스부르크 제국은, 오스트리아는 패배하면서 600년 동안의 긴 역사의 마지막 종지부를 찍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혜정 앵커 

네, 그렇게 600년을 이어온 가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정략 결혼을 통해서 가문의 권력을 계속 유지해 왔다고 하죠. 


특히 주목할 만한 인물이 있을까요?


라영균 교수 / 한국외대 

이 합스부르크 가문만큼 아마 결혼을 영토 확장에 무기로 사용한 가문은 아마 드물 겁니다. 


카톨릭을 수호하는 것만큼이나 합스부르크가의 결혼 정책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전통이었고요. 


그중에 대표적인 인물은 아마 막시밀리안 1세라고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막시밀리안 본인 자체도 두 번 재혼을 통해서 부르고뉴 지방, 오늘 날에 네덜란드, 벨기에 이쪽 지방인데, 경제적으로 아주 뛰어난 번성한 지역이었고, 그다음에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 지방에 있는 스포르자 가문과 결혼을 해서 영토를 확장했는데, 그것뿐만 아니라 자기 자녀들을 스페인의 아라곤, 공주와 왕자와 결혼을 시켜서, 근데 이제 공교롭게도 상속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다 일찍 사망, 요절을 하거나 사망을 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칼 5세 아까 말씀드렸던 칼 5세가 모든 외가와 친가로부터의 땅을 전부 다 상속받게 되죠. 


그러니까 결혼 정책을 통해서 그 막대한 막강한 제국이 출범하게 되는데 또 더 나아가면 이 막시밀리안 1세에는 자기 또 손자와 손녀, 다른 손자와 손녀도 폴란드 왕실과 자녀들과 결혼을 시켜서 또 영토를 확장하는데, 공교롭게도 여기서도 상속자가 일찍 사망을 합니다. 


그러면서 페레드랜드 1세가 이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의 모든 영토를 다 차지하게 되죠.


아주 할아버지의 기막힌 결혼 정책을 통해서 오스트리아가 이렇게 부강한 나라로 한때 부상하게 됐습니다.


이혜정 앵커 

교수님 말씀 중에요 유럽에 있는 웬만한 나라들은 다 나오는 것 같습니다. 


라영균 교수 / 한국외대 

합스부르크 피가 안 섞인 왕실은 유럽에 없었다고 할 정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혜정 앵커 

그런데 이렇게 정략 결혼이라는 게, 또 근친혼을 피할 수가 없어서 또 유명한 이야기죠. 


근친혼으로 인한 부작용이 있었죠?


라영균 교수 / 한국외대 

합스부르크 가문은 혈통을 지키기 위해서 정략결혼으로 근친혼을 항상 했는데, 이제 다른 가문하고 결혼했을 때 혈통이 끝나면 이제 상속권이나 왕위 계승을 다 상실하게 되는 위험이 있으니까 불가피하게 아마 근친혼을 계속 유지했던 것 같습니다. 


근친혼은 여러 세대를 거쳐가다 보면 유전병이라는 게 생기는데 많은 기형이라든가 면역결핍이라든가 아니면 무슨 정신질환 이런 것들을 낳게 되는데, 이 합스부르크 사람들에게서 주로 나타나는 것은 턱, 주걱턱이죠. 


그다음에 아래 턱이 발전에서 입술이 이렇게 막 튀어나오는 합스부르크 입술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유전병들이 나타났는데 합스부르크 왕실에 초상화들을 전부 다 한번 보시면 다 턱이 깁니다, 특징들이죠.


그래서 이제 마지막에 스페인의 카를로스 5세는 몸도 일으키지도 못하고 그다음에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결국은 아이도 낳지 못하고 대가 끊김으로써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는 이제 끝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 근친혼이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영토 확장의 무기였지만 한편으론 멸문의 어떤 그런 부분이겠죠.


이혜정 앵커 

네, 다시 전시회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이번 전시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수집한 특별한 예술품들이에요. 


우리 걸출한 화가들의 후원자이기도 했죠, 이 가문이?


라영균 교수 / 한국외대 

중세 궁정 사회에서도 예술을 후원하는 전통들은 늘 있었습니다만, 본격적으로 시작한 게 16세기, 막시밀리안 1세 때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예술 후원과 지원 이렇게 되는데,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것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부와 명예를 그리고 또 통치지배자들의 권위와 교양을 대외적으로 선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그런 수단이었죠. 


그래서 그중에서도 막시밀리안 1세나 이에 많은 예술을 후원했던 사람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어떤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알프스 북 지방은 르네상스의 영향이 미비했지만 합스부르크의 통치자들은 뒤늦게나마 영향을 받아서 많은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후원했는데 막시밀리안 1세의 경우에는 독일에 최고의 화가라고 할 수 있는 알브레히트 뒤러를 아주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작품을 남겼고 그다음에 칼 5세인 경우에는 티지안 같은 사람이 많은 초상화를 남겼습니다. 


그다음에 마지막으로 하나 더 언급한다면 루돌프 2세, 프라하의 성은 뮤즈의 성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철학자, 예술가, 천문학자 이런 사람들을 다 모은 장소였습니다.


그중에서도 궁정화가 였던 아르침볼도 같은 경우에는 우리가 많이 봤던 황제의 얼굴을 과일로 채소로 했던 그 장본인이, 궁정 화가였습니다. 


물론 또 하나 더 잊어서는 안 되는 게 스페인 왕실에 있어서의 천재 화가였던 벨라스케스가 펠리페 4세기 궁중 화가였죠.


그러니까 이 합스부르크 가는 예술을 장려했지만 그것이 황실의 권위를 대외적으로 선전하는 어떤 수단이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이혜정 앵커 

합스부르크가의 이런 예술 후원이 예술사조에도 영향을 주었지 싶습니다. 


역사를 알고 보면 참 더 흥미로운 전시이지 싶습니다. 


이번 전시는 내년 3월 1일까지 계속되죠, 수험생 여러분들도 한번 찾아보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교수님,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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