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에...北美 원주민이 ‘전국 애도의 날’ 기린 이유
11월의 넷째 목요일이었던 24일 저녁, 많은 미국인 가정은 칠면조 요리를 먹으며 401년째 내려온다는 추수감사절 전통을 지켰다. 1620년 11월11일 영국 국교도의 폭정을 피해 신세계로 온 영국 청교도들이 혹독한 첫해 겨울을 이겨내고, 그들에게 친절하게 옥수수 씨앗과 먹을 것을 준 인디언(미 원주민)들과 이듬해 함께 신(神)에게 감사의 만찬을 나눴다는 역사에서 비롯한 전통이다. 미국은 또 추수감사절 다음날인 25일인 ‘블랙 프라이데이’부터 크리스마스 쇼핑 시즌이 시작한다.
그러나 400년 전 영국인 청교도들을 친절하게 맞았다는 원주민인 왐파노아그(Wampanoag)부족의 후손들을 비롯한 ‘북미 인디언 연맹’ 회원들은 이날 정오에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의 왐파노아그 부족연맹의 대추장이었던 ‘우사메퀸’의 동상 앞에 모여 ‘전국적인 애도의 날’을 기렸다. 우사메퀸 동상은 영국 청교도들이 처음 도착했다는 ‘플리머스 바위(Plymouth Rock)’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이들은 “우리 공동체에 발생한, 수세대에 걸친 트라우마(trauma)와 역사적 상처를 애도하기 위해 오늘 여기 모였다”고 밝혔다.
400여 년 전 함께 즐겼다는 ‘추수감사절’이 한쪽에겐 감사의 날이, 다른 한쪽에선 애도의 날이 된것이다. 왜 그럴까.
미국의 많은 역사학자와 북미 원주민 후손들은 백인 신교도 위주의 미국 사회가 역사적으로 수차례 신(神)이 부여한 ‘위대한 미국’이란 운명을 강조하기 위해 없는 사실을 보태고 백인에게 치욕스러운 부분은 삭제하며 추수감사절의 신화(神話)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2019년 ‘이 땅은 그들의 땅이다’는 책을 쓴 조지워싱턴대 역사학자인 데이비드 J 실버맨은 스미소니언 매거진 인터뷰에서 “수많은 왐파노아그 후손들에겐 ‘추수감사절’이 매우 치욕스러운 역사”라고 말했다.
◇추수감사절에 초청받지 않은 인디언들
미국 주류사회의 추수감사절에 따르면, 영국 청교도 필그림(Pilgrims)들은 그들에게 농업 도구와 종자를 전해준 미국 원주민 왐파노아그(Wampanoag) 부족민을 초대해 함께 감사의 만찬을 가졌다. 그러나 사실 왐파노아그는 초대받지 않았다. 청교도들이 감사의 기쁨을 표시하며 머스킷 총을 쏘아대자, 왐파노아그 부족 연맹의 대추장 우사메퀸과 부족민들은 곧 전쟁이 일어나는 줄 알고 청교도들과 싸우러 왔다. 그러나 오해인 줄 알았고, 왐파노아그는 사슴 다섯 마리와 물고기, 뱀장어, 조류(鳥類) 등을 제공했다.
◇북미 원주민들, 이미 100년 간 유럽인들의 습격 받아
왐파노아그 부족은 영국 청교도들이 도착하기 100년 전인 1525년부터 거의 매년 유럽인들의 침입을 받았다. 수십 명이 끌려가 스페인에서 노예로 팔렸고, 살인과 약탈을 겪었다.
그들은 그래서 영국 청교도들의 플리머스 도착도 매우 경계하며 관찰했다. 그러나 일행 중에 여자와 아이들이 있었다. 왐파노아그 부족 후손으로 북미 원주민 역사학자인 폴라 피터스는 “약탈과 전쟁이 방문의 목적이 아닐 수 있겠다고 판단했고, 계속 청교도 정착민들의 숫자가 질병과 굶주림으로 줄어드는 것을 파악했다”고 말했다.
◇경쟁 원주민 부족 견제하려고, 필그림들에 친절 베풀어
청교도들이 도착한 다음 해인 1621년 봄 왐파노아그 연맹은 이들에게 일부 식물의 씨앗을 제공했다. 그러나 ‘친절’만이 순수한 동기는 아니었다. 69개 마을에 나뉘어 살던 왐파노아그 부족은 풍토병에 시달렸고, 서쪽에 위치한 나라간셋 부족과 전쟁 중이었다. 유럽인들과 ‘연합’하면, 그들의 금속 무기, 금속 도구가 나라간셋과의 전쟁에서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했다.
왐파노아그 부족의 일부 추장들은 신뢰할 수 없는 유럽인과 연합하느니, 차라리 나라간셋과 힘을 모아 유럽인들을 치자고 했지만, 대추장 우사메퀸은 청교도들과의 화친을 결정했다. 당시 북미 원주민 부족들 간에는 ‘연대감’ ‘동질감’이란 개념이 없었고, 그들은 각자 부족의 안녕만 추구했다.
하지만, 이후 30년간 이어진 평화는 청교도 정착촌의 확대와 질병의 전파, 왐파노아그 땅의 자원 약탈로 이어졌다. 또 북미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에게 땅을 팔았어도, 그 땅에 대한 영유권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전쟁은 불가피했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필립왕의 전쟁(King Pillip’s Warㆍ1675~1678년)’이었다. ‘필립왕’은 유럽식 복장과 관습을 받아들인 왐파노아그 부족장 메타코멧에게 유럽인들이 붙인 별명이었다. 북미 원주민들은 이 전쟁에서 크게 패했고, 이후 역사의 대세는 유럽인들에게 기울었다.
◇'화합의 추수감사절’ 신화의 시작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흔한 추수감사절 얘기는 친절한 인디언 부족이 나타나 청교도 정착민들에게 도움을 주고, 아메리카를 백인들에게 넘겨줘 자유와 기회, 개신교에 헌신적인 위대한 나라를 만들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19세기말~20세기초 많은 미국의 백인 역사학자들이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애틀랜틱 먼슬리는 밝혔다.
19세기말, 유럽에서 가톨릭 신자들과 유대계 이주민이 대거 들어오면서, 백인 개신교도들은 불만이었다. 이때쯤 미국은 신(神)으로부터 부여 받았다는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에 따라, 서부로 팽창하며 북미 원주민들을 가혹하게 학살하던 전쟁도 거의 마무리짓고 있었다. 또 남북전쟁 직후인 미국 재건의 시기(Reconstructionㆍ1865~1877)에, 미국 사회는 북미 원주민을 포함한 ‘국민 화합’의 건국 신화가 필요했다.
플리머스를 포함한 뉴잉글랜드의 초기 정착민들은 자신들의 거주지역에서 일어난 ‘무혈(無血) 식민지’가 미국의 시작이며, 이 식민주의는 인디언 전쟁, 노예제도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추수감사절 ‘만찬’도 나중에 전통으로 굳어져
1621년 첫 추수감사절 만찬을 제외하고는, 청교도 정착민들은 한동안 추수감사절 ‘만찬’을 베풀지 않았다. 오히려 금식과 기도, 신에 대한 간청으로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1769년 필그림들의 후손들은 점차 ‘뉴잉글랜드’가 식민들과 초기 미합중국에서 지역적 중요성을 잃어가자, “필그림들이 미국의 아버지”라는 아이디어를 퍼뜨리며 지역 관광 촉진에 나섰다.
그럼 지금의 만찬 전통은 언제 시작한 것일까. 실버맨 교수는 “1841년 알렉산더 영이란 목사가 필그림 연대기를 집대성하면서, 필그림 지도자 에드워드 윈슬로의 1621년 추수감사를 ‘뉴잉글랜드에서의 첫번째 감사이자, 거대한 축제’라고 표현한 주석(註釋)에서 비롯했다”고 밝혔다. 이 주석에서 착안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1863년 미국인의 단합을 꾀하기 위해 ‘11월의 마지막 목요일’을 추수감사절 공휴일로 지정했다. 이후 1941년 ‘11월의 네번째 목요일’로 바뀌었다.
24일 미국 추수감사절에 대추장 ‘우사메퀸’ 동상 앞에 모인 북미 원주민 부족들의 후손은 자신들이 400년 전 유럽인들에게 팔을 벌린 이래 이어진, 수많은 희생과 원주민 자녀들의 기숙학교 강제 수용과 백인화 교육, 개종(改宗), 문화ㆍ언어 말살로 이어진 슬픈 역사를 알리고 싶은 것이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