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김장철에 드는 생각

2022. 11. 25.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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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는 소금에 절여짐으로써
본래 속성을 상당 부분 희생
맛있는 김치 위한 통과의례
대입·취업 등 인생 전환기도
기존 나를 버려야 하는 과정

◆ 세상사는 이야기 ◆

어김없이 김장철이 다가왔다. 북한산 중턱에서 살 때는 11월 첫째 주나 둘째 주에 김장을 했는데, 비교적 포근한 구름산 마루에서는 11월 넷째 주도 늦은 것 같지 않다. 겨울이 오기 전에 준비하는 것 중에 김장은 특히 중요하다. 사찰에서는 김장김치를 겨울철을 넘어서 거의 1년 가까이 먹게 되니, 김치를 담그는 일이 더욱 특별한 월동 준비가 된다.

김치 담그는 일의 의미를 생각하다 보니 김태정의 시 '배추 절이기'가 떠오른다. 시인이 김장을 하기 위해 "아침 일찍 다듬고 썰어서/소금을 뿌려놓은 배추가/저녁이 되도록 절여지지 않는" 것이었다. 배추를 김치로 만들기 위해서는, 배추의 싱싱하고 빳빳한 기운을 눌러주어야 하는데, 좀체로 그 기운이 눌러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기야 배추라고 어찌 자기 성질이 없겠는가? 시인은 "소금을 덜 뿌렸나/애당초 너무 억센 배추를 골랐나/아니면 저도 무슨 삭이지 못할/시퍼런 상처라도 갖고 있는 걸까"라며 온갖 궁리를 다해본다.

김장철은 사람의 일생에 소금을 뿌려주는 시기와 겹친다는 생각이 든다. 김장철에 대학입시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있고, 그로부터 대학입시가 한층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이 무렵 기업체에서는 신입사원을 뽑고, 많은 젊은이들이 결혼식을 하고 신혼살림을 차리며, 졸업을 앞둔 학생들은 사회에 진출하거나 상급학교에 진학할 준비를 한다. 인생의 중요한 전환기가 미묘하게 김장철과 겹친다.

김장을 위해 배추를 절인다는 것은 배추로 하여금 아상(我相)을 내려놓게 하는 것이다. '나는 배추다'라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배추는 김치로서 재탄생할 수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대학입시는 대학생으로서 새로운 의식을 싹틔울 수 있도록 '나는 고등학생이다'라는 의식에 소금을 뿌려주는 것이다. 결혼식은 아직도 부모님 슬하에 있다는 의식에 소금을 뿌려주는 것이며, 입사시험은 보호자가 필요한 학생이라는 의식에 소금을 뿌려주는 것이다.

배추를 절이는 것은 일종의 '길들이는 것'이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말한다.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거야." '길들이는 것'은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길들여지기도 하고, 강제로 길들여지기도 하는데, 이를 '사회화'라고 부르고, 승가에서는 갈마(karma)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새로운 집단에 들어가면 쉽게 적응하지만, 어떤 사람은 적응하는 데 한참 걸리기도 한다. 김태정 시인의 배추도 그런 상황이다. 지금 배추는 김치로서 거듭나기 위해 시인에게 길들여지고 있으며, 사회화 또는 갈마 의식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삶에 보탬이 되는 대부분의 것이 날것 그대로가 아닌 새로운 통과의례를 거쳐 활용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부득이하게 그들의 속성을 어느 정도 희생시켜야 한다. 배추도 소금에 절여짐으로써 배추가 본래 가지고 있는 속성을 상당 부분 죽인다. 배추가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아니 우리가 강제로 배추로 하여금 아상을 버리게 함으로써 우리는 맛있는 김치를 먹게 되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직장에 들어오는 신입 직원, 우리 학교에 들어오는 신입생, 우리 승가에 들어오는 행자들도 아상을 버림으로써 명실공히 직원이 되고, 학생이 되고, 스님이 된다.

아상을 버림으로써 사회에 필요한 존재가 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다. 대학입시가 어찌 쉬울 것이며, 신혼생활이 어찌 간단할 것이며, 신입사원이 어떻게 만만하겠는가? 기존의 자기 자신을 버리는 뼈를 깎는 아픔 없이, 즉 '사회화 과정', 갈마를 거치지 않고 세상에 유익한 존재가 되기는 힘들다. 힘겹게 김치가 되고 있는 세상의 모든 배추들에게 감사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동명 스님 광명 금강정사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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