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동정담] 손흥민의 양말
◆ 필동정담 ◆
누군가의 발을 이렇게 유심히 본 게 언제였던가. 1998년 7월 7일 박세리 선수의 US여자오픈 18홀 연장전 때였나 보다.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에 신발과 양말을 벗던 모습, 고된 훈련으로 새카매진 피부에 따로 오려붙인 것 같던 새하얀 발, 전 국민이 그 장면을 보고 또 보지 않았나.
2022년 11월 24일, 또 한 번 전 국민의 마음을 들었다 놓은 '발'이 있었다. 카타르월드컵 조별리그 1차전, 대한민국과 우루과이의 후반전 경기 도중 손흥민 선수가 넘어졌다. 신발이 벗겨지고 양말이 찢어질 정도로 심한 태클이었다. 안와골절 수술 직후 '캡틴 조로' 마스크까지 쓰고 나선 경기였기에 국민들의 마음은 더 아팠다. 풀타임을 뛴 손 선수는 "괜찮습니다"를 연발하며, 남은 두 경기에 모든 것을 쏟아붓겠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박세리의 양말'은 IMF 구제금융 위기 직후 절망했던 국민들을 일으켜 세운 감동과 기쁨의 선물이었다. '손흥민의 양말'은 경제 불안과 애도의 슬픔으로 힘겨운 국민들에게 전하는 덤덤한 위로가 아닌가 한다. 너무 힘들 때는 그 어떤 낙관도 호들갑도 위로가 되지 않는데, 문득 아무 상관 없는 소소한 일에 갑자기 마음이 쏟아지며 괜찮아지기도 하더라니.
권여선의 단편소설 '사랑을 믿다'에 그런 장면이 나온다. 상처를 극복한 듯 보이는 극 중 주인공의 대사를 빌리자면 이렇다. "네 주위에 (보잘것없는) 것들에 집중해. 집중이 안 되면 마지못해서라도 감정이 그쪽으로 흐르도록 아주 미세한 각도를 만들어주라고. 네 마음의 메인보드를 살짝만 기울여주라고."
우리의 마음은 때로 작은 쟁반이다. 그 안에 슬픔이 가득 찼을 땐, 아주 조금만 기울이면 슬픔을 흘려보낼 수 있다. 광화문에 모인 붉은 악마를 보며 이태원 희생자들이 떠올라 눈물이 났고, 가상화폐 위믹스 사태를 보며 심판이 없다 못해 직접 선수로 뛰고 골까지 넣는 것 같은 작태에 분노가 치밀었지만, 손흥민의 찢어진 양말에 애써 마음을 기울였다. '2대1 대한민국의 승리'에 걸었지만 0대0이어도 괜찮은, 정말 괜찮은 밤이었다.
[신찬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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