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자백과 거짓말

2022. 11. 25.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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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경춘추 ◆

수원지검 특수부장으로 재직할 때 일이다. 검사들은 수습 시절 형사부와 공판부에 배속되어 선배로부터 실무를 배운다. '기초부터 제대로 배우라'는 의미에서 공안부나 특수부(현 반부패부)에는 배치하지 않는다. 어느 날 검사장 주재 청 내 행사를 진행하는데 수습 검사 한 분이 조용히 내 곁에 다가왔다.

"부장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직접 수사를 많이 해 보셨을 텐데, '자백(自白)'을 잘 받는 비결이 무엇인지 알려주십시오!"

난감했다. 평검사 시절, 자백을 잘 받는 검사가 아니었기에 '나도 잘 모르겠다'고 그냥 넘어가려다가, "조사 전에 증거를 철저히 수집하여 범죄 사실과 관련된 거짓말을 할 수 없도록 완벽한 준비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죄를 지은 사람도 '존경받는 남편이자 아버지'일 것이고, 해당 범죄를 빼면 '국가와 사회를 위해 좋은 일'도 많이 했을 것이다. 범죄 내용만 보자면 사람에 대한 미운 감정이 들겠지만, 최대한 배제하고 인간적인 교감 내지는 공감대인 '라포르'를 형성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자백에 이를 수 있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만 늘어놨다. 수습 검사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정말 만족한 것인지, 선배에 대한 예의 차원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음 날 아침 출근길에 동기인 공안부장을 만났다. 어제 있었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공안부 검사들은 어떻게 자백받느냐"고 물었더니, 어리석은 질문이라는 투로 웃으며 돌아온 대답은 이렇다.

"형, 공안부 조사받는 분들은 자백은커녕 거짓말이든 참말이든 무슨 말이라도 했으면 좋겠어요. 웬만하면 진술을 거부하니까요." 한 방 크게 맞은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피의자가 수사기관에서 '거짓말을 할 권리는 있는가?' 아니면 헤르메스의 궤변처럼 '거짓말은 하지 않되, 진실을 덜 말할 권리는 있는가?'

미국 연방대법원은 1998년 브로건(Brogan) 대 미 정부 판결에서 수사받는 피의자에게 '거짓말할 권리'가 없음을 명백히 밝혔다. 노조 간부가 '회사로부터 현금이나 선물을 받았느냐'는 연방 수사관의 질문에 '아니오'라고 답한 것이 허위진술죄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은 허용되나 거짓말을 할 권리는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은 우리나라와 달리 허위진술죄나 사법방해죄의 규정이 있어 수사기관에서 한 거짓말도 처벌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법에 수사기관에 대한 허위 진술을 처벌할 규정이 없다고 하여 '거짓말할 권리'가 헌법이나 법률에 따라 보장된다고 볼 수는 없다.

1981년 여대생 박상은 살해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 등을 통해 자백은 '증거의 왕'이라는 지위를 상실한 지 오래되었다. 디지털 포렌식 등으로 확보한 물적 증거 위주의 수사가 더욱 중요한 시대가 되었고, 핵심적인 증거는 피의자의 입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수사기관에서 거짓말할 권리가 있는 것 같은 분위기가 서초동에 만연되어서는 안 된다. 적극적인 거짓말로 '진실의 시간'이 멀어지고 길어진다면 그 피해자는 사법(司法)의 당사자, 즉 국민이 될 것이다. 실체적 진실 발견을 위한 '검찰의 시간'은 짧을수록 피해자에게도 피의자에게도 좋다. 변호인도 사실관계를 정확히 알려주는 의뢰인을 위해 보다 신속하고 적절한 변론을 할 수 있을 것임은 자명(自明)하다.

'사법은 신선할수록 향기가 높다.' 400년 전에 나온 명언이다.

[김후곤 로백스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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