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익수의 레저홀릭] 남자가 거실에서 잠드는 이유

2022. 11. 25.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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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익수의 레저홀릭 ◆

언제부터인가 모르겠지만, 나의 침실은 거실이다. 루틴은 이렇다. 거실에 이불을 편다. TV를 튼다. 그러다 소르르 잠이 든다. 딱히 보는 것도 없다. 영화를 봐도, 10여 분 보다 이내 돌리고 만다. 그런데 유독 꽂히는 게 있다. '나는 자연인이다' 프로그램이다. 내용이야 뻔하다. 야전 상의 하나 걸친 아재 한 명이 천막집에 산다. 꼬질꼬질한 산중 생활을 보여주는 건데도, 아, 이게 중독이다. 어느새 빠져들고 만다. 그리곤 엉뚱한 상상을 한다. '은퇴하고 나도 어디 한번 해볼까?'

놀라운 건 대한민국 중년 아재들이 나와 같은 상상을 하고 있다는 거다. 이 프로그램은 '한국인이 좋아하는 프로그램 톱10'에 매년 오른다. 액션물도 미스터리물 영화도 아닌, '나는 자연인이다'가 왜?

해답을 찾은 이가 있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여러가지문제연구소 소장)다. '나는 자연인이다 심리'의 근간을 에드워드 홀의 '공간학'에서 찾아낸다. 김 교수는 나만의 공간을 찾고 그 공간에서 지내고 싶은 욕망을 '슈필라움(Spielraum)'이라고 정의한다. 독일어로 '놀이(Spiel)'와 '공간(Raum)'을 합친 말이다. 글자 그대로 놀이공간, 여유공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만의 힐링공간으로 보면 된다. 옳거니. 그랬던 거다. 나도, 대한민국 아재들도 이런 자율공간, 여유공간이 없었으니 저렇게 산과 바다를 벗 삼아 야상을 걸치고 유유자적 살아가는 자연인이 그토록 부러웠던 것이다.

김 교수는 부연 설명도 친절히 곁들인다. 소변기 앞에서 침 뱉는 남자의 심보도 이 슈필라움에서 나왔다는 것. 이름하여 '45㎝의 공간학'이다. 홀에 따르면 45㎝ 거리는 엄마와 아기 같은 가장 친밀한 관계에서만 허용된다. 소변기 앞에 줄줄이 도열한 남자들. 순간, 이 45㎝를 침범받았다고 위협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런 불편감이 가래침 끓는 소리로 발현된다는 해석이다.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요즘 난리인 부동산 얘기로 초점을 틀어보자. 부동산, 즉 집이라는 공간(슈필라움)에 목숨 걸고 살아온 한국인이라면 집을 소유한 순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야 하는 것 아닌가.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김 교수는 이런 주장을 편다. 한국인에게 집은 진정한 슈필라움과는 의미가 다르다는 것. 이유인즉슨 이렇다. 한국인은 집을 재테크 수단, 즉 사용 가치가 아닌 교환 가치에 집중해 왔다는 설명이다. 추상적 교환 가치에 마음이 흔들리니, 슈필라움이 형성될 수 없다. 묘한 건 이 지점에서 남성과 여성이 갈린다는 점이다. 여성들은 집을 '자신의 슈필라움'으로 여긴다. 꾸미고, 닦고, 쓸고. 오롯이 자신의 것에 공을 들이고 시간을 투자하니 자신의 공간, 즉 슈필라움이 될 수 있다. 남성은 다르게 느낀다. 집을 그저 스쳐가는 공간으로 느낀다고 한다. 안방은 와이프에게, 건넌방은 아이들에게 '점령'당하고, 그저 골방에 틀어박혀 잠만 청하게 된다는 거다.

아뿔싸. 이젠 알겠다. 그리하여 마침내 내가 찾아낸 공간, 슈필라움은 거실이었던 거다. 가장으로서, 비록 핵심 방들은 아내와 아이들에게 빼앗겼지만 거실, 드넓은 공간만은 비록 밤 시간대이긴 하나, 차지하고 앉아 가장의 역할을 하고 싶어 버텼던 거다.

와이프여. 그러니 제발, 방에 들어가 자라고 닦달하지 마시게. 나의 슈필라움을 지키며, 오늘도 '나는 자연인이다'를 봐야 하니 말이오.

[신익수 여행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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