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군중을 바라보는 시선들
이태동 문학평론가, 서강대 명예교수
냉혹하고 무감각한 군중심리
때론 야만적 얼굴로 변하기도
엥겔스 · 보들레르 · 프루스트도
황폐한 대도시에 우울한 시선
떠밀리는 출퇴근길 · 집회 몸살…
군중으로 가득찬 서울은 어떤가
우리는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짧은 시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뤘다고 자랑해 왔다. 그러나 이로 인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적잖게 나타나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냉전시대에 미국으로 망명했던 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1978년 하버드대에서 했던 ‘찢어진 세계’라는 연설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민주주의의 군거(群居) 본능과 집단표준 수용의 필요성”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 그리고 “평범한 사람이 민주주의란 구실로 승리하게 하는 정신적인 고갈”은 물론 인구 집중 현상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산업화 이후 대도시의 지하철역에서는 아침저녁으로 출퇴근하는 샐러리맨들이 군중 사이에서 냉혹하게 떠밀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음은 물론, 온갖 소음으로 휴일의 정적을 깨뜨리는 수많은 군중 집회가 교통을 막고 있다.
군중은 사람의 집단이지만, 군중심리는 냉혹하고 무감각하여 그것이 분노하면 야만적인 상태로 변할 수 있다. 그래서 독일의 유명한 비평가 발트 벤야민이 함께 느끼며 썼던 것처럼, 19세기 이후 대표적인 지성과 시인 그리고 작가들은 하나같이 대도시의 군중에 의해 황폐해진 거리의 풍경에 대해 우울한 시선을 보였다. 프레드릭 엥겔스는 산업화 이후 런던의 인구 집중이 가져온 피해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런던 사람들은 문명의 경이로 가득 찬 그들의 도시를 창조하기 위해 인간성 가운데 가장 값지고 소중한 것을 희생해야만 했다는 것과 그들 속에 잠재해 있던 무수한 창조적 기능이 ‘인구 밀집 현상으로’ 활성화되지 못한 채로 억눌러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런던 거리에는 시끄러움과 그것에 대한 염증, 즉 인간성 그 자체에 대한 견딜 수 없는 혐오가 있다….”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 역시 대도시 군중의 움직임에 특별히 비판적인 자세를 보였다. 비록 그는 엥겔스와 달리 도시 현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본질적 기질적으로 비인간적인 군중의 야만성을 대도시 파리의 황폐한 거리에서 발견하곤 그것에 대해 우울한 시선을 보였다. 대도시 파리의 거리에 무섭게 밀려오는 군중에 대한 느낌은 그에게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는 군중을 배경으로 ‘악의 꽃’의 유명한 시편들 가운데 하나인 ‘지나가는 여인’을 썼다. 서정적이지만 심각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 작품에서 군중이란 단어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모든 사건은 군중의 움직임에 따라 이뤄져 있다.
‘주위에선 귀가 멍멍하게 거리가 노호하고 있다. / 상복 차림의 가냘프고 키가 큰 여인이 엄숙한 고뇌에 찬 모습으로, / 꽃무늬 레이스와 치맛자락을 / 화사한 손으로 치켜 잡고 지나갔다.
조상(彫像)과 같은 다리로 민첩하고 품위 있게, / 나는 미친 사람처럼 몸을 떨며 / 태풍이 싹트는 남빛 하늘 같은 그 여인의 두 눈에서 / 넋을 빼는 감미로움과 뇌살(惱殺)의 쾌락을 마셨다.
번갯불…그다음엔 어두움!―홀연히 사라진 여인 / 그 시선은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해 주었는데, / 영원 속에서나 그대를 만나게 될까?
저곳으로, 여기서 아득히 멀리로! 이미 늦었다! 아마 영원히 못 만나리! / 그대 사라지는 곳 나 모르고 내가 가는 곳 그대 알지 못하니, /오, 내가 사랑할 수도 있었을 그대, 오 그것을 알고 있던 그대였거늘!’
(김붕구 역)
이 소네트에서 보들레르는 미망인의 베일을 쓰고 군중에 의해 신비롭게 묵묵히 실려 가는 미지의 여인에 대한 충격적인 반응을 서정적으로 그렸다. 그는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이 여인에게 사랑의 기쁨을 느낀다. 그러나 그가 느낀 사랑이 첫 시선이 아니라 마지막 시선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것은 매혹적임과 동시에 영원한 작별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시는 군중에 밀려가는, 상복 입은 여인의 충격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비극적인 모습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시인이 ‘미친 사람처럼 전율하며’ 몸을 움츠린다는 것은 에로스로 충만한 인간의 희열이 아니라, 오히려 한 사람의 고독한 한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일종의 성적 충격 같은 것이다. 벤야민은 이것을 대도시에서의 삶이 사랑에 가하는 상흔(傷痕)으로 분석했다.
이뿐만 아니다. 20세기 최대 소설가인 마르셀 프루스트 또한 대도시의 삶이 사랑에 가하는 성적 상흔을 비극적으로 인식했다. 군중에 대해 많은 부분 보들레르와 견해를 같이했던 그는, 앞서 살펴본 소네트에서 그려진 ‘슬픔에 잠긴 그 여인’을, 작품 ‘파리의 여인’ 속에서 알베르틴의 모습으로 반영시켜 감동적으로 나타냈다. ‘알베르틴이 다시 내 방을 찾아왔을 때, 그 여인은 검은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그 검은 옷은 그녀를 창백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 여인은 불같이 뜨겁지만 창백한 파리 여인의 표상 같았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지 못하고 군중 속에서, 어쩌면 악의 분위기 속에서 살아감으로써 병에 걸린 여인, 두 뺨에 루주를 바르지 않으면 불안정해 보이는 어떤 눈길로써 알아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이것은 프루스트 시대까지도 도시 사람들이 경험하는 사랑의 대상이 지닌 모습이었다. 21세기 대도시 서울에는 군중 속에 떠밀려 흘러가는 상복 입은 여인은 없을까. 있다면 그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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