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로봇인간’ 돼 루게릭 맞선 ‘불굴의 5년’

나윤석 기자 2022. 11. 25.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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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게릭병에 걸린 후 기계와의 융합을 통해 ‘사이보그’가 된 로봇 공학자 피터 스콧 모건이 연구진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피터 스콧 모건 페이스북
피터 스콧 모건이 3D 아바타 구현을 위해 얼굴 근육을 스캔하는 장면. 피터 스콧 모건 페이스북

나는 사이보그가 되기로 했다 | 피터 스콧 모건 지음 | 김명주 옮김 | 김영사

장기에 인공튜브… 후두 적출

목소리 잃자 ‘기기 음성’ 대체

아바타 담긴 스크린으로 소통

“가상현실 통해 내 현실 되찾아”

“환자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건

‘죽는 편이 낫다’는 사고방식”

로봇공학자로서 전인미답 도전

‘까불지 마.’

루게릭병으로 2년의 시한부 선고를 받은 로봇공학자 피터 스콧 모건은 “진행되는 병을 손 놓고 지켜보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는 의사의 말에 속으로 이렇게 되뇐다. 전신 근육이 마비되는 루게릭병은 아직 치료제가 없어 발병 5년 안에 90%가 사망하는 질환. 모건은 죽음의 그림자가 삶을 덮친 순간 약 40년 전 자신이 출간한 ‘로봇공학 혁명’을 떠올렸다. 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예측이 담긴 책은 “인류와 인공지능(AI)이 융합하는 미래에는 인류도, AI도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어떤 처방도 제시하지 못한 담당 의사를 해고한 모건은 불치병에 걸린 몸과 AI를 융합해 생명을 연장하는 길을 직접 찾아 나선다. 인류 최초의 사이보그로 변신해 스스로 예측한 미래를 앞당기겠다는, 하루를 살아도 온전한 자신으로 존재하겠다는 담대한 목표와 함께. 모건이 쓴 ‘나는 사이보그가 되기로 했다’는 산송장과 다름없는 무의미한 연명을 거부한 로봇공학자의 분투와 좌절을 담은 휴먼 드라마다.

모건은 루게릭병으로 인한 사망이 ‘의학’이 아닌 ‘기술’과 ‘공학’의 문제라고 판단했다. 루게릭병 환자들은 대개 음식을 삼키지 못해 굶어 죽거나 숨을 쉴 수 없어 질식사하기 때문이다. 이에 모건은 뜻 맞는 의료인들과 함께 위와 결장, 방광에 3중으로 인공 튜브를 삽입하는 수술을 진행했다.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생리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수술로 ‘멀쩡한 장기’를 손상할 위험이 있어 의료계에서 시도하지 않던 방식이었다. 여기에 모건은 침이 기도로 넘어가 질식하는 일을 막고자 후두 적출 수술을 받았다. 이를 통해 수명 연장에는 성공했으나 어쩔 수 없이 목소리를 잃었다. 하지만 모건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세계 최고의 정보기술(IT) 기업들과 협업해 실제 목소리와 유사한 ‘기기 음성’을 구현했다. ‘안구 추적’으로 눈동자가 전동 휠체어에 부착된 키보드의 키를 따라가면 기기가 문자를 조합해 모건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기술이었다. 길고 완전한 문장이 오가는 대화는 어려워도 간단한 안부 인사나 감사 표시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이와 함께 모건은 얼굴 근육 마비로 표정을 드러내기 힘들어지자 얼굴을 스캔한 AI 기반의 3차원 아바타가 담긴 소형 스크린을 가슴에 달고 사람들과 소통했다. 모건은 이를 ‘피터 1.0’에서 ‘피터 2.0’으로 거듭난 과정이라고 적는다. “피터 2.0은 절반의 기계와 절반의 생물로 이뤄진 사이보그지만, 그 안에는 온전한 ‘피터’가 존재했다. 가상현실은 현실에서 도망치는 수단이 아니다. 가상현실을 통해 나의 현실을 되찾았다.”

사이보그 변신에 대한 기록이 한 축이라면, 다른 축은 어린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는 모건의 삶을 조명한다. 로봇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모건은 학계에 남는 대신 과학기술 기업의 경영 컨설턴트로 활약했다. 대학을 막 졸업한 1980년대 초반만 해도 로봇 연구에 대한 학계의 지원이 부족했던 탓이다. 막대한 자본을 보유한 기업에서 로봇 연구를 수행한 모건은 조직 발전을 저해하는 행동 알고리즘 분야로 관심사를 확장했다. ‘컨설턴트 모건’에게 명성을 안겨준 건 오랫동안 반복된 관습에 얽매이는 조직 행태가 모험적 시도를 가로막는다는 ‘암묵적 규칙’ 이론이었다. 수십 년이 흘러 모건이 불치병과 맞서 싸운 과정 역시 암묵적 규칙을 ‘해독’하는 투쟁이었다. 그가 보기에 기적의 치료법이 등장하기만을 기다리며 루게릭병 환자에게 “죽음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하는 의학계야말로 암묵적 규칙에서 벗어나지 못한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모건은 “환자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건 부족한 기술이 아니라 ‘죽는 편이 낫다’는 사고방식”이라며 “규칙을 깨는 행동만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든다”고 말한다.

책은 모건의 사랑 이야기도 비중 있게 서술한다. 부유한 명문가에서 성장한 모건은 20대 초반 부모에게 성적(性的) 지향을 ‘커밍아웃’한 후 가족과 단절된 삶을 살았다. 게이 호텔에서 만난 프랜시스와 27년간 사랑을 이어온 그는 2005년 법이 개정되면서 영국 최초의 동성애 부부로 화제를 낳았다. 사이보그의 삶을 개척한 용기도, 사랑을 지켜낸 의지도 규칙과 관습에 굴하지 않는 태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과학이 마법으로 통하는 길이라면, 사랑은 최종적으로 모든 것을 이기는 힘이다.” 연대순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구성은 ‘과학자 모건’과 ‘인간 모건’이 결코 분리된 존재가 아님을 보여준다.

2년의 시한부 선고를 받은 모건은 5년이 넘는 시간을 버틴 끝에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피터 3.0’, 즉 뇌와 AI를 연결해 육신은 병실에 있어도 모건의 생각을 실시간으로 전하는 기계가 다른 공간에서 사람과 교감하는 존재를 향한 꿈은 미완으로 남았다. 주인공이 죽음에 이르는 가슴 아픈 비극이 실패의 서사가 아니라 성장 드라마로 다가오는 것은 도전과 응전을 통해 새 길을 열어젖힌 인간의 초상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다만 공학자가 쓴 논픽션임에도 휴먼 스토리의 성격이 강한 탓에 최첨단 AI 기술이 어느 지점까지 도달했으며,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는 무엇인지에 관한 학문적 검토가 부족하다는 점은 아쉽다. ‘인간을 위한 기술’이라는 주제를 좀 더 심층적으로 탐구했다면, ‘감동 실화’를 넘어 과학계는 물론 죽음을 피할 길 없는 우리 모두에게 논쟁적인 화두를 던졌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452쪽, 2만2000원.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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