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썼던 21가지 단어 … 그 속에 감춰진 왜곡된 인식

2022. 11. 25.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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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강간당한 기분이었어." 언젠가의 술자리에서 지인이 말했다.

지인은 부당한 일을 겪으며 느낀 불쾌함을 '강간당한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그렇기에 '강간당한 기분'이란 오직 강간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 게 어디 '강간'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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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서재

“마치 강간당한 기분이었어.” 언젠가의 술자리에서 지인이 말했다. 그는 과거에 경험한 부당한 일을 떠올리며 분개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왠지 석연치 않은 느낌을 받았지만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웠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은 안다. 당시의 찜찜함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를. 그것은 정확하지 않은 언어 때문이었다.

지인은 부당한 일을 겪으며 느낀 불쾌함을 ‘강간당한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기분을 확실히 전달하고자 했다. 그와 같은 표현을 통해 그가 겪은 불쾌함은 확실히 강조되는 효과가 있는 반면, 실제 강간 피해자들의 고통은 축소된다. 신체적·정신적 상흔을 남기는 심각한 폭력이 그저 ‘불쾌한 상황을 겪은 뒤의 더러운 기분’의 연장선이 되고 만다. 강간이 ‘살면서 누구나 한두 번쯤 겪는 부당한 일’의 한 종류가 되어버린다. 그렇기에 ‘강간당한 기분’이란 오직 강간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실제 성폭력 피해자가 ‘강간당한 기분’이라 표현하는 일은 없다. 그런 게 어디 ‘강간’뿐일까. 예술사회학 연구자 이라영의 ‘말을 부수는 말’(한겨레출판)을 읽으며 우리 사회의 많은 ‘말’을 다시 생각해 본다.

‘말을 부수는 말’은 정확하지 못한 언어가 인식과 사고의 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고, 그럼으로써 폭력과 부조리를 얼마나 공고하게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책이다. 이라영은 ‘노동’ ‘시간’ ‘혐오’ 등 21개의 키워드에 걸쳐 우리 사회가 직면한 화두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치밀하게 파헤친다. ‘고통’부터 ‘아름다움’에 이르기까지, 삶과 맞닿아 있지만 너무 가까워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갔던 일상의 언어를 낱낱이 해체한다.

끊임없이 질문하는 그의 책을 통해 독자는 비로소 깨닫게 된다. 일상에서 흔히 쓰는 표현에 얼마나 많은 권력과 위계가 숨어있는지, 정확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나 역시 책을 읽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작가로서 동료들과 출간 소식을 주고받을 때마다 “마치 아이를 낳은 기분이다” 같은 이야기를 했지만, 창작을 출산에 비유함으로써 두 키워드의 사회적 맥락이 아주 쉽게 소거된다는 것을. 마감이 힘들어 몸부림칠 때마다 ‘창작의 고통’을 호소했지만, 육체적 노동과 거기 수반하는 고통을 표현하는 언어가 현저히 부족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같은 방식으로 저자는 거듭 묻고 고민한다. 타인의 고통을 전달하는 가장 윤리적인 방법은 무엇인지, 혐오의 언어는 어떤 방식으로 퍼져나가는지에 대해서.

정확한 언어는 윤리적이며, 그러므로 아름답다. 물론 정확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아름답고 정확한 언어의 세계에 가닿는 것,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는 말을 하는 것은 끝내 불가능한 소망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소망이 불가능함을 깨닫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을 멈추지 않는 것이야말로 정확한 언어로 나아가는 출발이 아닐까. 행동은 사고를 통해 이루어지고, 사고는 언어가 지배한다. 정확한 언어를 꿈꾸는 것에서 변화는 시작될 것이다.

한승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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