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장서 라면을 끓이겠다고 뭉친 'MZ 국악인들' [조재현의 조명]

조재현 기자 2022. 11. 2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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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협주곡' 무대 꾸민 '작곡가' 이재준, '퍼포머' 박소희
"'쓸데없는 고퀄' 작업 계속할 것"…"재밌는 방식으로 국악 알리고파"

[편집자주] 조명(照明). 사전적으로는 '광선으로 밝게 비추거나 무대의 예술적인 효과를 위해 빛을 비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또 '어떤 대상을 일정한 관점으로 바라본다'는 뜻도 있습니다. [조재현의 조명]을 통해 '다양한 빛' 아래 살아가고 있는 문화·예술계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볼까 합니다. 묵묵히 제 몫을 하는 문화·예술인들 모두 조명받을 이유는 충분하니까요.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창작음악 축제 '3분 관현악' 중 '辛라면 협주곡-라면' (국립극장 제공)

(서울=뉴스1) 조재현 기자 = 지난 9월30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보라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여성이 비닐 봉지를 손에 들고 무대 위로 걸어 나오자 객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슬리퍼에 이른바 '똥머리'(상투처럼 말아 올린 머리)까지. 약속이 펑크 난 토요일 낮, 침대에서 종일 뒹굴다 집 앞 편의점에 요깃거리를 찾아 나서기 딱 좋은 차림새였다.

그가 비닐 봉지 속에서 꺼낸 것은 '라면'.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캡틴 손흥민이 광고 모델로 활약하는 바로 그 라면이었다. 객석 곳곳에선 웃음이 터졌다. 무항생제 달걀까지 야무지게 챙겨온 그는 테이블 위에 세팅된 양은 냄비에 물을 넣기 시작했다. 설마 했지만…맞았다. 라면을 쩍 하니 반으로 가르고, 수프를 탈탈 흔들고, 달걀까지 탁 깨트려 넣었다. 그렇게 무대 위에선 라면 조리가 이뤄졌다.

전례를 찾기 힘든 이 무대는 국립극장 전속단체인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창작음악 축제 '3분 관현악' 공연 중 하나였다. 프로그램 북에 적힌 곡명은 '辛라면 협주곡-라면'(이하 라면 협주곡). 라면 조리 과정을 보는 것인지, 음악을 듣는 것인지 경계조차 모호한 무대가 끝나자 객석에선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 "국악을 많이 알리고 싶었는데, 이런 방식이면 되겠다 싶었죠"

"하고 싶은 걸 해도 된다길래, 그래서 했어요."(이재준)

"라면 끓이는 퍼포먼스가 확정됐다는 말을 들었을 땐 진짜 미쳤다고 생각했었죠."(박소희)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창작음악 축제 '3분 관현악' 중 '辛라면 협주곡-라면' 무대를 꾸민 작곡가 이재준(오른쪽)과 라면 퍼포머 박소희가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최근 국립극장에서 만난 '작곡가' 이재준(26)과 '라면 퍼포머' 박소희(25)는 '라면 협주곡' 무대를 이같이 회상했다. '3분 관현악'은 짧고 강렬한 소통을 선호하는 MZ세대에 맞춰 국악을 참신하게 풀어보자는 취지로 마련됐다. 이를 위해 모인 젊은 작곡가 10인은 자신의 음악적 개성을 3~5분 분량의 곡에 녹여냈다. 신선한 시각이 돋보이는 곡들이 여럿이지만, 화제성만 놓고 본다면 '라면 협주곡'의 완승이었다.

"원래 진부한 것을 싫어해요. 보통 작품 위촉을 받으면 진지한 모습을 강요받을 때가 많은데, '3분 관현악'은 진짜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평소 좋아했던 라면을 주제로 써보기로 했고, 무대에서 라면까지 끓이면 더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하하"(이재준)

많고 많은 라면 중 왜 그 라면이었을까. 이재준이 20년 넘게 즐겨 먹는 라면이어서다. 그렇게 작곡가의 사심이 넘쳐흐르는 무대가 마련됐다.

무대 위 안전 문제로 인해 실제 라면을 조리한 것은 아니었으나, 조리 과정 전반을 국악기로 절묘하게 표현한 게 곡의 핵심. 예컨대 가스 불을 켜고 물을 끓이는 과정은 모듬북과 더블베이스, 거문고, 아쟁 등 저음악기의 긴박한 연주로 담는 식이다.

퍼포머가 라면을 반으로 갈라 하나씩 물에 넣는 순간엔 경쾌함이, 딱딱하게 굳은 야채·분말 수프를 공중에서 흔들 때는 흥마저 느껴진다. 달걀까지 깨트려 넣자 곡은 절정을 향해 치닫고, 라면이 완성된 순간 연주되는 음악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무대는 나지막하게 연주되는 익숙한 CF 로고송으로 끝을 맺는다. 조리 과정에서 발생하는 소음도 음악의 일부가 됐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창작음악 축제 '3분 관현악' 중 '辛라면 협주곡-라면' (국립극장 제공)

참신함을 넘어 신박했던 이 무대는 사실 '찐' 실력·케미를 자랑하는 젊은 국악인 2명이 빚어낸 것이다.

서울대 국악과(작곡 전공)를 졸업한 뒤 같은 대학원에 재학 중인 이재준은 제34회 동아국악콩쿠르 일반부 작곡부문 은상과 국립부산국악원 국악대학축제 작곡발표회 관현악 부문 우수작, 2021 아르코(ARKO) 한국창작음악제(이하 아창제) 국악부문에 선정된 바 있는 주목받는 작곡가다.

그가 국악의 매력에 빠진 것은 초등학생 시절. 한 살 터울의 형이 단소를 부는 모습에 매료되면서다. 국악중에 들어간 뒤 단소와 선율이 비슷한 대금을 배우고 싶었지만, 대금을 연주하기엔 당시 손이 크지 않아 피리를 택했다. 연주 외에 본인 만의 음악도 만들고 싶다는 꿈을 키워 갈 무렵, 하필 몸이 좀 아팠다. 배에 힘을 줄 수 없어 피리와 같은 관악기 연주가 쉽지 않았다. 이재준은 작곡으로 방향을 틀어 국악고에 들어갔고, 대학을 거쳐 본격적인 국악 작곡가로서 발을 내디뎠다.

세계 최초의 라면 퍼포먼스를 선보인 '협연자' 박소희 역시 촉망받는 가야금 연주자다. 이재준과 마찬가지로 국악중·고, 서울대 국악과를 거쳐 현재 동 대학원에서 가야금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그는 제28회 고령전국가야금경연대회 대학부 대상, 제19회 구례전국가야금경연대회 일반부 대통령상을 받은 실력파다. 선배 이재준과는 지난해 아창제 그리고 2019년 서울대 60주년 정기연주회에서 이미 손발을 맞췄던 사이. 두 무대에서 연주된 곡은 이재준의 25현 가야금 이중협주곡 '별똥별'이었다.

"국악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근데 이번 공연을 해보니 알겠더라고요. 진중한 것도 좋지만, '라면 협주곡' 같은 무대로 다가가는 게 더 쉽고,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박소희)

객석은 단번에 사로잡았으나 곡이 무대에 오르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애당초 라면을 끓이는 퍼포먼스는 지휘자 몫이었다. 하지만 지휘와 퍼포먼스를 동시에 하는 게 어려워 마감 직전 곡을 고쳐야 했다. 막바지엔 라면 조리 퍼포먼스를 빼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이재준이 초연 때만큼은 퍼포먼스를 반드시 넣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완벽한 공연이 성사됐다.

"처음엔 지휘자님이 3일간 악몽을 꾸셨다고 들었어요. 하하. 그런데 전문 퍼포머가 투입된 후 제대로 된 지휘가 가능해졌기에 어려운 박자가 나와도 진두지휘가 가능해 진 셈이죠." (이재준)

관심은 컸다. 악단 단원들까지 나서 무대를 위한 아이디어를 던졌다. 지인들을 상대로 의상에 대한 의견도 물었다. 잠옷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지만, 박소희는 차마 그럴 순 없었다. "나중에 증손자가 볼 줄 누가 알아요. '잠옷바람 할머니'로는 기억되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게 공연 당일 'OOTD'(오늘의 옷차림)는 본인이 좋아하는 색상의 트레이닝복으로 결정됐다. 이재준이 흔쾌히 지갑을 연 덕분이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창작음악 축제 '3분 관현악' 중 '辛라면 협주곡-라면' (국립극장 제공)

가야금 대신 라면 봉지를 든 박소희는 무대를 즐기는 듯했다. 긴장감 따윈 없었다. 셀카는 기본이요, 실제 메시지도 주고받았다. 해맑은 표정으로 지휘자와 합을 맞추는 모습에 관객들은 웃음을 참기 바빴다.

"무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연주에 포함된다고 생각했어요. 오히려 직접 연주할 때보다 부담도 없고, 떨리지도 않았죠. 하하. 곡도 짧고 혼자 부담해야 할 것도 생각보다 없더라고요. 휴대전화로 메시지도 받고 그러니까 진짜 웃음도 나고, 무엇보다 공연 중 찍은 영상, 사진을 SNS 계정에 올릴 생각에 너무 설렜죠."

그렇게 무대가 끝나자 작곡가는 엄지척을 날렸고, 퍼포머는 머리 위로 하트를 그렸다. 이재준은 후배에게 공을 돌렸다. "소희가 아니었으면 이 정도 재미있는 무대는 나오지 않았을 것 같아요."

◇ "음악은 묻혔지만…괜찮아요, 재밌잖아요"

뜨거웠던 반응만큼 공연 후 부정적인 평도 나왔다. 라면 퍼포먼스에 시선이 집중된 탓. 하지만 이재준은 개의치 않았다.

"음악이 아예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었어요. 하하. 그런데 작곡가로서 실험을 해가는 단계라 생각합니다. 라면 협주곡을 또 무대에 올릴 기회가 생기고, 실제 조리가 가능하다고 하면 음악에 힘을 더 뺄 생각도 있어요. 반대로 음악을 더 강조하는 방법도 있으니까요."

남들이 하는 음악은 굳이 하지 않겠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재준은 대학생이 된 후로도 남들과 다른 길을 걸었다. 톡톡 튀는 곡 제목만 보더라도 진지함과는 거리가 있는 성격이 잘 묻어난다. 그는 자신의 음악을 한 줄로 표현하면 '쓸데없이 고퀄'(높은 퀄리티)이라고 했다. 유머는 기본 베이스다. 그런 그에게 3분 관현악 무대는 맞춤 수트와 같았다.

"상상해 보세요. 라면 협주곡을 서양 오케스트라로 바꾼 다음에 파스타를 끓이는 것으로. 그것도 재미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유머는 만국 공통어잖아요. 그걸 방패 삼아 나만의 예술 세계를 펼치고 싶습니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창작음악 축제 '3분 관현악' 중 '辛라면 협주곡-라면' 무대를 꾸민 작곡가 이재준(오른쪽)과 라면 퍼포머 박소희가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박소희 역시 만족스러운 무대였다고 돌아봤다. 가야금 연주자의 체통을 깎는다는 눈초리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자랑스러웠어요. 누군가 비웃을 수 있겠지만, 그건 취향의 차이라고 생각해요. 국립국악관현악단과의 협연 무대에 선 것 자체가 자랑이죠. 주변에선 '대단하다'고 해요. 국립극장에서 라면 끓이는 퍼포먼스를 한 사람이 또 누가 있겠어요. 후회는 전혀 없어요."

이재준은 이번 무대를 하면서 국악을 바라보는 시야를 한층 넓혔다고 했다. 3분 관현악 무대에는 5명의 서양 음악 작곡가도 참여했는데, 선입견 없이 국악에 접근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배움을 얻었다.

"때로는 국악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곡을 들으면 알아요. 국악만 오래 하신 분들 만의 틀이 있거든요. 참신한 음악을 하겠다고는 하지만 국악과 가깝게 지내다 보니 아직 버리지 못한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죠."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창작음악 축제 '3분 관현악' 중 '辛라면 협주곡-라면' 무대를 꾸민 작곡가 이재준(오른쪽)과 라면 퍼포머 박소희가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 전통도 유지하고 싶긴 한데…고민하는 MZ세대 국악인

"굶어 죽지 않는 작곡가가 되고 싶어요."

인터뷰 말미에 못다 한 말이 있냐는 질문에 이재준이 웃으며 꺼낸 말이다. '라면 협주곡'처럼 앞서가도 한참을 앞서간 곡을 발표하고서, 국악계 '주류'로 어떻게 살아남겠다는 건지 속내가 궁금했다. 그는 사람들이 기대할 수 있는 곡을 쓰고 싶다고 강조했다. 타깃은 너무 진지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맞춤형 작곡가로서 영역을 구축하겠다는 의미.

"작곡가가 이재준이라면 '이번엔 또 무슨 짓을 하나' 궁금해서 찾아보게 만들고 싶죠. 아마 대중예술 분야라면 저 같은 사람은 살아남기 힘들었을 겁니다. 대중의 니즈를 맞출 자신은 없거든요. 그래서 아직은 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 그걸 좋아해 주시는 분들이 있어요. 앞으로도 이런 음악을 계속하고 싶죠. 마흔, 쉰 살이 돼도 젊은 세대와 소통하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 그게 꿈입니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창작음악 축제 '3분 관현악' 중 '辛라면 협주곡-라면' 무대를 꾸민 작곡가 이재준(오른쪽)과 라면 퍼포머 박소희가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박소희는 거스를 수 없는 '국악의 현대화'에 대한 생각도 털어놨다. 서양 악기와의 협연을 넘어 댄스·전자음악, 때론 힙합과도 섞이는 국악을 볼 때면 전통은 정작 뒷전일 때가 많아서다. 신선함 만을 좇다 보니 '이젠 발로 가야금을 켜야 관심 좀 받을 수 있겠다'는 자조 섞인 농담마저 할 때가 있다. 학생 신분으로 전통적인 면에 집중하다 보니 시대와 맞는 국악이란 과연 무엇인지 자문하게 된 것이다.

"재미있고, 신선한 음악을 통해 사람들이 국악을 많이 알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지금은 새로운 것에만 너무 집중하게 되는 것 같아 헷갈려요. 국악이 품은 진짜 전통의 맛은 어디로 갔나 싶을 때가 있어서요. 앞으로 전통적인 공연만 보면 지루해하지 않을까 그런 우려도 들어요. 새로운 것과 전통이 잘 조화를 이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일단 저부터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연주자가 될게요."

ⓒ News1 김초희 디자이너

cho84@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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