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숲] 길냥이 묻어준 자리에 피는 봄꽃들

2022. 11. 25. 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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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했다가 대문간으로 들어서니 집안이 떠들썩했어.

길냥이가 돌담을 넘어와 무슨 사고를 친 듯.

혹한 이라 아내는 해산한 길냥이에게 북어 껍질 삶은 물에 밥을 말아 먹이고 사료도 꼬박꼬박 챙겨줬어.

하지만 봄이 돼 죽은 길냥이 묻은 자리에 새싹이 돋아나 식물들이 꽃을 피우기도 하는데 그걸 보는 묘한 기분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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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했다가 대문간으로 들어서니 집안이 떠들썩했어. “말썽꾸러기 요놈, 이제 밥 챙겨주나 봐라!” 장독대 부근에서 대빗자루를 손에 꼬나 쥔 아내가 돌담 밖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 길냥이가 돌담을 넘어와 무슨 사고를 친 듯. 아내는 나를 보자 장독 위에 얹혀 있는 빈 채반을 번쩍 들어 보였어. “잘게 썬 대봉감을 말리려고 채반에 담아 장독에 올려놨는데, 냥이 녀석이 홀랑 뒤집어버렸지 뭐예요!”

우리 집 같은 오래된 한옥에서는 자주 벌어지는 일. 대문을 닫아둬도 도둑처럼 돌담을 넘어와 제집처럼 활보하는 동물들. 특히 천적이 없는 길냥이들은 우리 집을 아예 제 놀이터로 삼곤 하지. 녀석들 덕분에 쥐가 없어지고, 땅속을 헤집고 다니며 나무뿌리를 갉아 먹어 나무들을 말려 죽이는 두더지도 거의 사라져 더러 고마워하기도 하지만 이래저래 애증이 엇갈리는 길냥이들. 그렇게 미운 짓을 해도 천상 어미 맘을 지닌 아내는 항상 사료를 준비해두곤 하지.

지난겨울엔 이런 가슴 아픈 일도 있었어. 목탄 빛깔의 길냥이가 우리 집 헛간 지붕 밑으로 몰래 들어와 새끼를 다섯마리나 낳았거든. 혹한 이라 아내는 해산한 길냥이에게 북어 껍질 삶은 물에 밥을 말아 먹이고 사료도 꼬박꼬박 챙겨줬어. 한달쯤 지나자 눈을 뜬 길냥이 새끼들이 어미를 따라 마당으로 내려와 양지쪽에 모여 앉아 볕을 쬐더라. 그런데 얼마 뒤 새끼들이 독감에 걸렸는지 며칠 사이에 네마리가 죽었어. 그렇게 죽은 길냥이를 묻어주는 건 내 몫. 텃밭의 얼어붙은 땅을 곡괭이로 파고 새끼 네마리를 파묻었지.

그렇게 시름시름 앓다 죽은 생명을 땅에 묻어줄 때는 마음이 무척 아려. 하지만 봄이 돼 죽은 길냥이 묻은 자리에 새싹이 돋아나 식물들이 꽃을 피우기도 하는데 그걸 보는 묘한 기분이라니. 꽃다지·냉이·광대나물·민들레 등 온갖 봄꽃이 그 죽음이 묻힌 자리에서 화사하게 피어나는 것. 그걸 보면 ‘죽음은 고통을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으로 삶을 피운다(고재종 <독각>)’는 시구가 떠올라. 그러니까 시인은 죽음을 존재의 끝이 아니라 우주 생명의 순환 질서 속에서 보는 것. 이처럼 공생하는 생명들이 순환의 거울을 통해 일상에 휩쓸려 깜박깜박 잊곤 하는 내 생로병사도 저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는 각성의 시간을 맞이하지.

미우나 고우나 길냥이와 또 부대껴야 할 계절. 사흘 전부터 기온이 영하로 곤두박질쳐 아궁이에 불을 지피기 시작했지. 부뚜막이 따뜻해지면 길냥이들은 귀신처럼 알고 찾아와 따끈한 부뚜막에 몸을 비벼대지. 그제 밤에도 불 지핀 골방에 들어가 처음 잠을 잤는데 길냥이들이 몰래 부뚜막에서 잠을 자고 간 흔적.

어제는 날씨가 더 추워 아궁이에 장작을 좀더 넣고 구들방이 덥혀진 뒤 방으로 들어와 잠을 청하려 누웠는데 어느새 부뚜막으로 찾아든 길냥이들. 발톱 세워 긁는 소리를 들으니 한두마리가 아닌 듯…. 그래, 너희 때문에 단잠을 못 이룰지라도 겨우내 독감에 걸려 죽는 일은 없기를. 꽃 피는 봄이 오기까지 너희 주검을 묻기 위해 얼어붙은 땅을 파는 일은 없기를. 제발!

고진하 (시인·야생초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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