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429) 파혼

2022. 11. 25.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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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나앉을 판인 숙재
이모 꼬드김에 넘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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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재는 3년 전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탈상을 하고 나자 어머니가 또 드러누웠다. 일가친척도 본체만체하지만 그 와중에 그래도 어릴 적부터 둘도 없는 친구 민채가 쌀자루를 이고 오고 북어를 몇마리씩 들고 오곤 해 입에 거미줄 치는 신세는 면했다. 그러나 쌓여만 가는 외상 약값은 감당할 수가 없었다.

몇뙈기 남았던 논밭은 진작에 아버지 약값으로 넘어간 지 오래고 살고 있는 집도 저당 잡혀 길거리에 나앉을 판이다. 약혼자 송 초시가 가끔 들러 엽전 꾸러미를 던지고 갔지만 이제는 그의 발길도 뜸해졌다.

숙재에게 악마의 손이 뻗쳐왔다. 저잣거리에서 장사하는 먼 친척 이모가 돈 보따리를 들고 와 손도장을 찍었다. 두어달 연명을 하고 어머니도 떠났다. 초라한 빈소에 친구 민채와 둘이 앉아 눈물도 말라 가끔 곡소리만 내는 시늉을 했다.

사십구재를 지내고 탈상을 하고 나자 집이 남의 손에 넘어가고 먼 친척 이모를 따라 저잣거리로 갔다. 기생집을 하는 이모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혼례날짜만 손꼽아 기다렸다.

약혼자 송 초시가 찾아와 나를 데려가겠지 하는 희망의 끈이 동강 난 날이 왔다. 혼례날짜를 한달 앞둔 어느 날, 송 초시네 집사가 찾아와 파혼 서찰을 불쑥 던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뺐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부엌 아궁이 앞에 앉아 불꽃을 바라보며 술을 한잔 마셨다. 생전 처음 마신 술이 그렇게 낯설지 않았다.

생각은 먼 옛날로 돌아갔다. 여섯살 때였던가. 아버지 유 진사 손을 잡고 절친인 송 처사네 집에 갔다. 유 진사와 송 처사는 대청에 앉아 연신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대작을 하고 숙재는 안마당에서 두살 아래 송 처사 아들과 소꿉놀이를 했다. 송 처사가 두 아이를 대청으로 불러올렸다.

“너희 둘은 십년 후에 혼례를 올리고 가시버시가 되는 거야.”

유 진사의 딸 숙재와 송 처사의 네살 아들 동호는 무슨 말인지 몰라 눈만 말똥거리는데 두 아버지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술잔을 부딪쳤다. 그때 송 처사는 마고자 주머니에서 엽전 두닢을 꺼내 하나씩 나눠줬다.

숙재는 고쟁이에 찬 작은 엽전 주머니를 풀어 주머니째 활활 타는 불꽃 속으로 던져버렸다. 하나 아쉬운 건, 지난해 봄 또 과거에 낙방하고 만취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송 초시가 죽어버리겠다며 숙재에게 찾아와 품에 안기는 걸 뿌리쳤어야 했는데 달래다 보니 치마까지 벗었던 것이 후회막급이다.

숙재는 이모의 꼬드김에 순순히 넘어가 기생이 됐다. 출중한 미모에 어릴 적 조부님으로부터 배운 한시(漢詩)로 선비 손님들과 어울리니 명기로 이름을 떨쳤다.

얼마 후 숙재는 억장이 무너지는 소식을 들었지만 한잔 술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송 초시가 혼례를 올렸는데 각시가 하필이면 친구 민채라니! 그날 밤 숙재는 손님상에 앉아 날름날름 주는 대로 술을 받아 마시고 만취가 돼 민 참봉 품에 안겼다.

민 참봉어른이 머리를 얹어줬다며 기와집 한채 집문서를 숙재 품에 안겨줬다. 민 참봉은 비록 술과 풍류를 즐기는 한량이지만 사람이 학식이 있는 데다 후덕했다. 쉰이 갓 넘은 노인이지만 숙재는 그를 진심으로 좋아해 자기 집에 오는 날이면 손수 장을 보고 그의 전신을 안마와 지압으로 풀어줬다. 천석꾼부자 민 참봉은 아낌없이 숙재를 돌봤다.

기생집 주인 이모는 아파 드러누우며 숙재를 불러 거래를 제안했다. 모자란 돈은 민 참봉이 보태 기생집이 숙재의 것이 됐다. 이모는 돈 보따리를 싸들고 딸네 집으로 들어갔다.

민 참봉어른도 몸이 그전 같지 않아 제 집에서 약을 달고 다니며 숙재집 나들이가 가뭄에 콩 나듯이 뜸해졌다. 늦가을 찬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날 밤 술집 문을 닫으려는데 취객 하나가 문을 밀며 들어왔다. 송 초시였다. 두루마기가 꾀죄죄했고 사람도 삐쩍 말랐다. 찬모가 개다리소반에 간단히 술상을 차려왔다. 자작 술 한잔을 마시고 픽 쓰러지는 걸 보고 숙재는 집으로 들어갔다.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장터에서 가마니때기 두어장 펴놓고 아기를 업고 쪼그리고 앉아 냉이·씀바귀·달래 등 푸성귀를 파는 젊은 아낙에게 나이 지긋한 여자가 찾아와 푸성귀 몇전어치 사고 주머니 하나를 던지고 사라졌다. 주머니를 열어본 아낙은 엉덩방아를 찧으며 놀라 자빠졌다. 백냥도 넘었다. 푸성귀 장사치는 민채고 나이 지긋한 여자는 숙재네 찬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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