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평평론자·기후위기 부정론자 만나봤습니다만 [책&생각]
지구 평평론자 학회 찾아 대화 시도한 철학자
이들에게 중요한 건 사실·증거 아닌 ‘정체성’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과 즐겁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법
의심을 생산하는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철학적 대화 실험
리 매킨타이어 지음, 노윤기 옮김 l 위즈덤하우스 l 2만2000원
“우주에서 촬영한 지구 사진은 모두 가짜입니다. 인간은 달에 착륙한 사실이 없으며, 나사(NASA·미 항공우주국) 직원과 이에 동조하는 수백만명이 지구가 평평(flat)하다는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음모에 가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권위에 짓눌려 믿음을 강요받지 마십시오!”
2018년 11월 미국 콜로라도주 한 호텔에서 열린 ‘평평한 지구 국제학회’. 강연자의 발표가 끝나자 600여명의 청중이 우렁찬 박수와 함성을 보냈다. 그러나 이들 틈에 끼어 앉은 한 남자는 동조도,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의 이름은 리 매킨타이어. 20여년간 탈진실 시대 과학 부정론을 연구한 미국의 철학자다.
그가 용감무쌍하게 ‘적진’ 깊숙이 침투한 이유는 하나. 과학 부정론자를 설득할 만한 ‘실전’ 대화법을 터득하기 위해서다. 과학 부정론자란 쉽게 말해 과학을 믿지 않는 사람, 어떤 과학적 증거를 제시해도 자신의 신념을 바꾸지 않는 이들이다. “나는 과학과 비과학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 증거에 부합하지 않는 가설을 기꺼이 변경하려는 수용적 태도라고 생각한다.” 과학 부정론자는 과학의 내용(합의)뿐 아니라 과학적 태도 그 자체까지도 부정하는 사람들이다. 대표적으로 지구 평평론자(지구는 둥글지 않다, 평평하다), 기후변화 부정론자(기후위기는 실체가 없다, 음모다!), 코로나19 부정론자(코로나19는 그냥 감기다, 5G 기지국 때문에 생겨났다…), 지엠오(GMO·유전자변형작물) 부정론자(지엠오는 해롭다) 등이 있다.
책과 강연을 통해 독자들에게 “과학 부정론자를 설득하려면 그들을 만나 진지한 대화를 나눠보라”고 수차례 조언했지만 정작 자신은 이들과 대화한 경험이 전무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저자는 ‘평평한 지구 국제학회’를 찾아간다. 첫 상대로 가장 센 상대를 고른 것이다. 이어 생계와 직결돼 기후변화를 부정할 것이라고 ‘추정’되는 석탄산업 종사자, 지엠오 부정론자와 차례로 끝장 토론에 나선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과 즐겁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법>은 ‘책상물림’ 철학자의 첫 실전 체험기를 여러 관련 선행연구와 버무려 담아냈다.
결론만 가지고 말하자면, 저자의 도전은 실패에 가깝다. 저자가 만난 사람 가운데 대화 이후 신념을 수정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고 아주 소득이 없지는 않다. 저자는 지구 평평론 학회의 ‘셀럽’ 격인 남성에게 저녁을 사겠다며 토론을 제안한다. 식사 내내 저자가 제시하는 지구가 둥글다는 모든 증거를 모조리 반박(?)한 그는 ‘이 질문’을 받고서야 마침내 머뭇거린다. “선생님의 믿음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구체적으로 어떤 증거가 필요할까요?” 그를 잠시나마 무장해제시킨 건 ‘증거’가 아니었다. 상대로 하여금 스스로의 신념을 재검토하게 유도하면서도 당신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점을 피력하는, 사려 깊은 ‘질문’ 그 자체였다. “과학 부정론자와 대화하는 목표는 그들에게 의심의 기회를 만들어주어 다른 관점에서 대상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다.”
48시간 동안 ‘적진’에 머무른 끝에 지은이는 또 하나의 인사이트를 얻는다. “지구 평평론은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 이들의 ‘정체성’ 그 자체였다… 지구 평평론은 그들에게 응원할 팀을 제공했고 그들의 불만감을 충족시켜 주었다.”
저자는 이런 양상이 나타나는 학술적 배경으로 댄 카한의 ‘정체성 보호 인지’(identity-protective cognition)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카한은 연구 참여자에게 비이념적인 사안(화장품의 효과)과 이념적인 사안(총기 규제의 효과)에 관한 동일한 수학 문제를 풀게 했다. 비이념적 사안에서는 수학을 잘하는 사람이 정답을 맞혔지만, 이념적 사안에서는 수학 실력과 문제풀이력이 비례하지 않았다. 외려 총기 규제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즉 이념적 정체성이 인지 능력에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답을 얻기 위해 논증을 했다.” 무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보호하려다 과학 부정론자가 됐다고 보는 게 더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증거 그 자체보다는 “증거가 제시되는 방식이, 증거를 제시하는 사람이, 그들이 이것을 받아들이는 인식론적 맥락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다소 뻔하지만 신뢰, 존중, 개인적인 대화를 과학 부정론자를 ‘전향’시킬 핵심 키워드로 꼽은 이유다.
기후변화·지엠오 부정론자와 대화 실험을 시도하나 딱 떨어지는 ‘실전 대화법’을 얻는 데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기후변화 부정론자일 거라고 예측했던 석탄 노동자는 예상외로 기후변화를 수용하고 있었고, 그가 진보진영의 과학 부정론 사례로 거론했던 지엠오 부정론자 동료 역시 기나긴 토론 이후에도 신념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시도를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비교적 합리적인) 과학 ‘회의론자’와 ‘부정론자’를 어떻게 구별해야 하는지, 누군가 그럴듯한 말로 엉터리 주장을 펼 때 이것이 과학 부정론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아차리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과학적 합의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모두 부정론자는 아니다. 하지만 합의를 믿으려 하지 않는 데다 신념을 바꾸려면 도대체 어떤 증거가 필요한지에 대해 말하기를 꺼리는 사람은 부정론자일 수 있다.”
과학 부정론자의 “공통 각본”을 알아두는 것 역시 도움이 된다. 이들은 ①체리피킹(유리한 증거 취하기) ②음모론에 의존 ③가짜 전문가 동원 ④논리적 오류 ⑤불가능한 목표 설정 등 다섯 가지 수사학을 주로 이용한다. ‘백신이(혹은 지엠오가) 100% 안전한가?’ ‘지구온난화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은 언뜻 합리적 의심처럼 보이지만, 이는 “귀납적 논증의 특성 탓에 언제나 약간의 잔여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과학의 본질을 부정하고, 이를 약점 잡아 자신의 엉터리 주장의 근거로 전환하는 전형적인 과학 부정론자의 수사학이다. 저자는 이들과 과학적으로 대화하려면 과학에 내재한 불확실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과학자와 과학 부정론자의 한 끗 차이는 ‘수용적 태도’에 있기 때문이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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