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라캉 알리는 데 모든 것 바친 ‘라캉의 사도’
수제자 자크 알랭 밀레의 삶·사상
상식을 넘어선 현실계
자크 알랭 밀레와 라캉 오리엔테이션
니콜라 플루리 지음, 임창석 옮김 l 에디투스 l 1만6000원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알랭 밀레(78)는 자크 라캉(1901~1981)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라캉은 프로이트가 창시한 정신분석학을 구조주의 언어학으로 재해석해 프로이트 이론과는 아주 다른 모습의 정신분석학을 세웠다. 정신분석학의 라캉적 단계라 할 만한 것이 라캉 이론이다. 밀레는 그 라캉의 수제자이자 사위로서 라캉 정신분석 이론을 정리하고 다듬어 널리 퍼뜨린 사람이다. 바울이 예수의 가르침을 기독교로 체계화해 보편적 종교로 세웠듯이, 라캉 교의를 알리는 데 평생을 바친 라캉의 사도가 밀레다. 프랑스 정신분석가 니콜라 플루리가 쓴 <상식을 넘어선 현실계>는 밀레의 삶과 사상을 간추려 소개하는 책이다. 밀레의 관심이 온통 라캉을 해석하고 대중화하는 데 놓였던 만큼, 밀레 사상 소개는 사실상 라캉 정신분석 이론의 소개와 다르지 않다. 그리하여 이 책은 밀레를 통해 들여다본 라캉 이론, 특히 전기 라캉과 뚜렷이 대비되는 ‘최후기’ 라캉의 핵심을 전하는 책이 됐다.
밀레가 학문 이력을 시작한 곳은 철학이다. 1962년 파리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한 밀레는 철학을 전공으로 삼아 존 로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시기에 밀레는 급진 좌익 운동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는데, 특히 프랑스 공산당의 이론가였던 고등사범 교수 루이 알튀세르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1963년 알튀세르는 젊은 밀레에게 ‘라캉 읽기’를 임무로 맡겼다. 밀레는 그동안 발표된 라캉의 모든 글을 읽고 라캉이 말하는 ‘주체’를 구조주의 이론과 연결해 깔끔하게 해석해 냈다. 이 작업이 밀레 삶에 결정적 변화를 안겼다. 같은 해에 밀레는 라캉의 ‘세미나’에 참여해 정기적으로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66년에는 라캉의 요청을 받아 라캉이 생전에 펴낸 유일한 저서인 <에크리>의 색인 작업을 했다. 이로써 ‘라캉 사도 밀레’의 길이 열렸다.
이후 밀레는 라캉의 어지러운 사유를 체계를 잡아 정리함으로써 보통사람들이 알아먹을 수 있는 모습으로 만들어내는 데 특출한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특히 라캉이 27년 동안 계속한 세미나의 내용을 편집해 출간한 데서 밀레의 역량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밀레는 자신이 한 작업을 이렇게 묘사했다. ‘라캉의 문체는 말라르메처럼 응축돼 있다. 나는 라캉의 문체를 볼테르적인 명료한 문체로 번역해 독자가 읽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라캉은 헤라클레이토스처럼 어둡고 난해한 존재였다. 나는 거기에 빛을 비추어주었다.’ 밀레는 자신을 완전히 비워버리고 라캉으로 자기 내부를 채우는 방식으로 이 모든 작업을 해냈다. 이런 작업 방식을 두고 밀레는 “나는 나의 특수성을 말살했다”고 표현한다. 1981년 라캉 사후 밀레는 라캉의 법통을 이어받았고 라캉 이론에 토대를 둔 세계정신분석협회를 세웠다. 분명한 것은 밀레의 그런 헌신적인 작업이 없었다면 라캉의 이론이 그토록 큰 위력을 발휘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을 알려주는 명제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무의식은 언어와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명제일 것이다. 이 명제는 1960년대에 정점에 이른 구조주의 시기에 정립된 라캉 이론을 요약하는 말이다. 이 책이 주목하는 것은 구조주의를 지나 라캉이 말년에 도달한 이론이다. 밀레의 작업을 통해 선명해진 라캉 최후기 이론은 ‘라캉에게 대항하는 라캉’이라고 부를 만큼 ‘반라캉적’이다. 요컨대, 구조주의 시기의 라캉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라캉이 말년의 라캉이다. 구조주의자 라캉은 인간을 둘러싼 세계를 상상계와 상징계와 실재계(현실계)로 나누고, 그 가운데 상징계를 해석하는 데 특히 몰두했다. 상상계가 분열된 주체가 자신을 통합해 만들어낸 나르시시즘적 자아상을 가리킨다면, 상징계는 우리를 둘러싼 언어적 질서를 가리킨다. 언어로써 우리는 이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고 받아들인다. 그 언어적 질서의 너머에 있는 세계가 실재계인데, 이 실재계는 우리 언어가 가닿을 수 없고, 그래서 끝내 알 수 없는 세계다. 알 수는 없지만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무의식의 세계가 실재계다. 말년의 라캉은 이 실재계를 이론적 탐사의 초점으로 삼았다.
이 책은 라캉 사유의 그런 전환을 ‘증상과 환상’이라는 정신분석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증상(symptome)이란 정신병을 앓는 사람이 겪는 고통을 말한다. “증상은 견뎌내기 힘든 것이어서 분석가에게 상담을 받도록 이끈다.” 반면에 환상(fantasme)은 ‘주체가 스스로 만족하는 장소’, 곧 주체가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는 지점을 뜻한다. 환상 안에서 주체는 자신의 존재를 향락(향유)할 수 있게 된다. 구조주의적 라캉 이론에서 정신분석 작업은 ‘증상’을 통해서 주체 곧 환자가 자신의 환상을 들여다보고 그 환상을 횡단함으로써 종료된다. 환상을 횡단하면 증상은 완화되고 환자는 ‘새로운 주체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라캉의 생각은 큰 변화를 겪는다. 최후기 라캉은 증상과 환상을 ‘증상’으로 통합한다. 이렇게 통합된 증상을 표현하려고 라캉이 끌어다 쓴 말이 증상(symptome)의 고어 ‘생톰’(sinthome)이다. 환자가 분석 치료를 통해 증상이 완화됐을 때 환자 안에 남는 증상이 바로 ‘생톰’이다. 이 생톰, 곧 잔여 증상은 여전히 고통스럽지만 향락할 만한 것이다. 생톰은 고통의 원인이자 향락의 토대다. 이 생톰과 친해지는 것이 말년의 라캉이 제시한 정신분석의 목표다. 생톰을 다스리고 생톰과 함께 살아가는 것, 이것을 두고 이 책은 ‘생톰을 향한 동일화’라고 부른다.
생톰을 안은 주체는 어떤 일반적인 동일성으로 자신을 해소하지 않고 자신의 독특한 존재 자체를 긍정하는 주체다. 곧 ‘나는 누구의 자식이다’, ‘나는 의사다’, ‘나는 공산주의자다’ 따위 일반적 규정은 주체의 고유성을 드러낼 수 없다. 나는 다른 어떤 사람과도 닮지 않은 존재다. 그런 내가 고통스럽고 괴로운 증상을 안고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존재를 긍정한다. 이런 자기 수용과 자기 향유가 정신분석을 통해 주체가 도달하게 되는 상태다. 밀레의 연구는 이 말년의 라캉 이론을 특화하여 정신분석의 영토를 넓힌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벤투 ‘고집 아닌 뚝심’…빌드업, 이강인 카드 모두 통했다
- 이태원 유족에 “6시까지 연락 없으면 의견 없다고 간주”
- 우루과이 에이스도 감독도 입 모아 “한국전 어려운 경기였다”
- 소금구이 붕어빵 먹어봤어?…이렇게 먹으면 더 맛있대
- “대파 끝 노랗게 말라붙어…올해 같은 가뭄은 반평생 처음”
- ‘모두가 모두를 이길 수 있다’ 혼돈의 H조…한국엔 나쁠 게 없다
- 윤 대통령, 화물연대 파업에 “업무개시명령 검토…타인 자유 짓밟아”
- 히잡 시위 유혈진압·사형·성폭행…결국 유엔이 나선다
- 윤 대통령은 존슨이 선물한 ‘처칠 팩터’ 내팽개쳤나 [아침햇발]
- 따뜻한 날, 다 갔어…갑자기 ‘영하 10도’ 되는 다음주 수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