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 자본주의, 자동화 아니라 미세노동을 먹고산다 [책&생각]
‘보이지 않는’ 미세노동 현실 파헤쳐
노동자 없는 노동
플랫폼 자본주의의 민낯과 미세노동의 탄생
필 존스 지음, 김고명 옮김 l 롤러코스터 l 1만6000원
인공지능(AI)과 자동화를 앞세운 디지털 기술은 기계가 알아서 자동차를 주행시키고, 무인 매장에서 물건을 팔고, 카메라로 특정인의 얼굴을 포착해 맞춤 서비스를 제공하는 ‘유토피아’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런 세상에 ‘과연 노동은, 노동자는 존재할 수 있는가’ 물음이 나오곤 하는데, 이 묵직한 물음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검색 엔진, 앱, 스마트 기기 배후의 “은밀한 자동화 장소”에는 항상 노동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글로벌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가장 변방으로 내몰린 ‘잉여 인구’로, 단돈 몇 센트를 받고 수많은 데이터에 라벨을 지정하거나 주석을 다는 일부터 설문 응답, 녹취록 작성 등 극도로 파편화된 작업들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기술이 만드는 미래가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라면, 그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 기술은 “노동을 자동화한다기보다 비공식화하고 있다.”
노동의 미래와 기후변화 대응, 경제 계획 등을 연구하는 영국의 대안적 싱크탱크 ‘오토노미’(Autonomy)의 선임연구원 필 존스가 쓴 <노동자 없는 노동>은 ‘미세노동’(microwork)이라는 그럴듯한 말을 통해 노동을 비공식화하고 감추는 플랫폼 자본주의의 민낯을 까발리는 책이다. 소액대출(microcredit)처럼 노동 앞에 ‘마이크로’라는 접두어를 써서 만든 이 단어는 인공지능을 학습시키는 ‘데이터 라벨링’ 등 자동화에 연료를 대주는 노동 형태를 폭넓게 가리킨다. 온라인 공룡 아마존이 만든 ‘메커니컬터크’는 세계 최초이자 이 분야를 대표하는 미세노동 중계 사이트다. 의뢰인이 이미지에 태그를 다는 등 초소형·초단기 일감들을 올리면, 노동자(‘터커’라 불린다)는 원격으로 이를 처리해주고 돈을 받는다. 중계 사이트는 건당 20퍼센트를 수수료로 챙긴다.
아마존의 사내 서비스였던 메커니컬터크는 2005년 공식 출범했으며, 이후 애픈(Appen), 스케일(Scale), 클릭워커(Clickworker) 등 다양한 미세노동 중계 서비스들이 생겨났고, 구글·페이스북 등 다른 온라인 공룡들도 미세노동 사이트에서 수행되는 작업에 기댄다. 예컨대 보행자나 동물, 표지판, 신호등 등을 제대로 인식하도록 수많은 데이터에 라벨을 다는 일을 거치지 않으면 자율주행자동차를 만들 수 없다. 구글은 미국 국방부 발주로 무인드론의 인식률을 높이는 ‘메이븐’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미세노동 중계 사이트인 피겨에이트(현재의 애픈)에 일감을 준 바 있다. 최근 추정치를 보면 전 세계적으로 미세노동 종사자는 2천만명에 이르며, 그중 상당수는 범남반구에 분포해 있다. 국제노동기구의 한 설문조사에선 노동자의 36%가 주 7일 동안 규칙적으로 미세노동을 수행한다고 응답했다.
지은이는 미세노동의 탄생이 지난 10여년 동안 “경제 회복이 무한정 지연된 결과로 탄생한 하등 취업(subemployment)”의 절정이라고 본다. “하등 취업은 극도로 단기적인 임시 취업, 무보수 노동이 대량으로 요구되는 취업, 심각한 불완전 취업 내지는 노동 빈곤, 가장 불우한 유형의 실업보다도 나은 삶을 보장하기 어려운 취업을 아우르는 말이다.” 2차대전 이후 번성했던 자본주의는 1970년대 본격화한 수익성 위기로 오늘날 성장이 정체되어 고용은 더이상 늘지 않고 공급은 과잉으로 치닫는 데 이르렀다. 노동의 가치가 급격히 떨어져, 0시간 계약, 무급 노동 등 노동자들이 실업보다도 못한 상태의 일자리까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바로 하등 취업이다.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자마자 다시 시장 침체와 구조조정의 마수에 빠진 범남반구에선 공식 취업이 극소수 특권층의 전유물이 될 정도로 예전부터 하등 취업이 만연했고, 지금은 범북반구에서도 번져가고 있다. 그 절정에 있는 게 미세노동이다. 지은이는 “플랫폼 자본주의가 미세노동 사이트를 통해 더욱 광범위한, 따라서 더욱 추적이 어려운 공급 사슬을 확충하면서 비공식 노동의 논리와 현실을 자본 축적의 새로운 표준으로 만들고 있다”고 짚는다.
미세노동은 과거라면 ‘직업’으로 묶일 수 있었던 일들을 조각조각 쪼개고, 이에 대해 완료한 작업 건수를 기준으로 보수를 지급한다. 빅토리아 시대에나 있었던 ‘건별 지급제’를 다시 살려내어 노동의 표준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현금보다 상품권이 보수로 지급되며, 이마저 지급하지 않는 일도 허다하다. 미세노동 사이트 중 유일하게 임금이 계산되는 메커니컬터크의 경우, 노동자의 평균 시급은 2달러에도 못 미친다. 어떤 사이트는 작업을 디지털 공간에서의 ‘놀이’로 포장한다. 공식 노동에서 밀려나 달리 취업할 방도가 없는 ‘잉여 인구’는 단돈 몇 센트라도 벌기 위해 이런 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미세노동자는 자기가 하는 일이 자기 일자리를 빼앗을 인공지능을 교육하기 위한 것인지, 자기 고향을 타격하기 위한 살상용 드론을 제작하기 위한 일인지조차 알 수 없다.
정보기술(IT) 공룡들은 미세노동을 통해 노동을 보이지 않게 감추는 대신 자동화의 유토피아를 앞세운다. “노동자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으리으리한 기계와 눈부신 혁신, 천문학적인 기업 가치 평가액이 난무한다.” 기계를 교육시키고 수수료를 ‘따먹는’ 것뿐 아니라 미세노동 자체로부터 거대한 데이터를 확보하는 것이 이들의 주된 목표다. 세계은행이나 ‘사마소스’ 같은 임팩트 투자회사 등은 미세노동이 유연성과 독립성을 보장하며, 개발도상국 노동자들에게 “일을 제공”할 수 있다 주장한다. 전 세계 각지의 난민·재소자들이 대규모 미세노동력을 동원하는 이들의 초기 목표였다는 점은, 플랫폼 자본주의의 제물이 바로 공식 경제에서 배제된 ‘잉여 인구’라는 사실을 너무도 정확하게 드러낸다.
“머잖아 하나의 안정적인 직업만 갖고 있는 사람들과, 다른 한편으로 아침에는 남의 개를 산책시키고, 낮에는 남의 집을 청소하고, 저녁에는 친구 역할을 대행하고, 밤에는 온라인 작업을 찾아야만 하는 사람들로 이분화된 새로운 양극화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미세노동을 찬양하는 이라면 ‘이게 왜 문제냐’ 물을지 모른다. 그러나 미세노동이 표준이 된 세상은 임금이 없는 세상, 노동조합, 노동운동, 노동자 보호 제도 등 노동자가 자신을 지킬 수단을 모두 잃은 세상이라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문제다.
지은이는 임금 노동으로부터 추방당한 사람들이 연합한 ‘무임금 운동’, 곧 소득과 관계없이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요구하는 것을 방향으로 제시한다. 최대한 착취를 위한 실리콘밸리의 상상은 “실직보다 나을 게 없는 삶을 초래하는 노동”을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임금이 실종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임금을 넘어선 세상을 상상해야 한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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