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희가 작정하고 내놓은 연작소설 [책&생각]
첫 연작…‘사랑-상실’ ‘나-나’로 길항
크리스마스 타일
김금희 지음 l 창비 l 1만5000원
크리스마스가 한달 앞이라 꼽은 건 아니다. 사랑하는 이에겐 한해가 크리스마스같이 충만하고 상심한 이에겐 하루하루가 크리스마스처럼 잔인한 법. 그 날들의 기묘한 양면을 부감하되 또박 “우리는 무엇도 잃을 필요가 없다” 서서한 희구로 소설가 김금희가 올해 크리스마스를 작정하고 내놓은 <크리스마스 타일>이다.
전언했듯 내용으로 보아 각편 모든 이야기는 만남과 상실로, 인과는 공연히와 우연히로 나뉘어 길항한다. 그리고 하나 더 추가되는 양분.
소설 인물은 나와 너 이전에 나와 또 다른 나로도 나뉜다. 말하자면 나와 나의 만남과 상실, 공연히 그리된 나와 우연히 그리한 나…. 본진은 아닐지언정 적어도 소설의 뒤끝은 여기로부터의 파동이다.
2009년 등단한 김금희의 첫 연작소설로서, 7편은 독립적이나 필시 서로 이어지는데 그때 어떤 인물은 이편에서 볼 수 없던 내면 내지 삶의 자취를 다른 편에 숨겨둔다. 흩날리는 작은 마음들 잔설 녹을세라 극진히 그리고 희맑게 되비추는 12월의 김금희식이랄까. “…무엇이, 어떤 사람이, 어떤 시간이 진짜인가를 생각해보기 위해서…”(‘작가의 말’)
‘월계동 옥주’에서 상처를 입은 자 옥주는 ‘크리스마스에는’에선 상처를 입힌 자다. 상처를 입은 과정은 주변의 세계가 공연히 작정한 듯 모질었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힌 과정은 우연히도 모질었던 모양이다. 부모, 스승, 연인·‘베프’와의 결별이 한데 몰아쳤고(‘월계동 옥주’), 특히 헤어진 연인은 대학시절 자신을 진심으로 따랐던 후배 커플의 남자(‘크리스마스에는’)였으니 옥주는 그 두 후배로부터 원망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독자는 두 편이 교직 되면서―아마도 옥주가 아는 이상으로―알게 된다.
상처 입은 후배 여성(지민)의 입장에서―옥주는 모를―옥주를 얘기하는 게 ‘크리스마스에는’이다. 옥주와 이중연애하는 남자친구에게 지민은 “처음부터 날 속인 거”라며 분노하지만 거기엔 “내 사랑과 내 정성과 내 마음은 모욕감 속에 완전히 밀폐돼” “목적도 쓰임도 없는 악취 같은 것”이 되었다고 자학하는 데서 보듯 옥주의 매력에 마음을 빼앗겼던 자신에 대한 자신으로부터의 분노도 있겠다.
상실감으로 실상 도피해간 중국에서―아마도 지민과 닮았을 법한―현지 여대생 예후이를 만나 관계 맺으며 완만히 치유법을 찾아가는 경로는 졸업 후 방송피디가 된 지민이 막내 작가 소봄과 자매애를 맺어가며 깨진 유리조각 같은 마음들을 수거해 가는 경로와 닮아 있다. 비로소 서로의 행복 무엇보다 나와 나의 화해를 구하게 되는데, 이는 “너무 상한 사람 곁에는 있지 말라”는 소싯적 할머니의 충고(‘데이, 이브닝, 나이트’, 주인공은 막내 작가 소봄의 남동생 한가을)가 소설 전체에 물든 흔적이라 하겠다. 말인즉 ‘상하지 않음’은 사랑받을 이의 자격인 동시에 사랑하는 이의 자격이기에 “상한 사람” 때문이라면, 한가을이 그런 것처럼, 공연히 우연히도 상심하지 말라는 위로와도 같다.
상실에도 도리가 있다, 는 말로 바꿔도 될까. 문득 휘갈겨둔 이 억지가 그러나 ‘당신 개 좀 안아봐도 될까요’에서 얼마나 애틋하게 진리가 되는지 놓치긴 어렵다.
‘당신 개 좀…’은 침잠하면서도 상실 너머를 애면글면 바라보(게 되)는 대개의 인물들과 달리 궁벽한 상실의 지점에 최선을 다하여 머물러 있다는 데서 올돌하다.
“나는 수술이 잘못돼 갑자기 호두를 잃었어… 얼마나 자책을 많이 했는지 그냥 나라는 인간 자체가 싫은 느낌 있잖아. 배가 고프거나 똥이 싸고 싶거나 하면 어느 순간보다도 나라는 인간이 생생하게 느껴지는데, 나에게 그런 것조차 해주고 싶지 않은 느낌. 내가 나로 살 수 있는 기회를 다 빼앗아 버리고 싶은 생각에 시달렸어… 근데 세미씨는 너무 오래 자기 자신을 벌주지는 마. 애들이 알면 슬퍼해.”
‘설기’를 잃은 직장인 세미를 주변에선 성심으로 위로하지만, 그는 그저 “이 상실 안에 안주하고 싶다.” 설기가 그런 존재다. “그렇게 사랑한다면서 지키지 못”했다며 세미를 “슬퍼할 자격도 없다” 자책하게 하는. ‘장수했다’ 위로하는 무식하지만 마음 따뜻한 동네 친구 양요가 또한 슬퍼 “호상이라는 게 어디 있나” 답하는 세미 엄마에게 “(설기 말고 호상이란 이름의) 개가 한마리 더 있었어요?” 놀란 개처럼 물어도 세미는 웃을 수가 없는, 그런 개.
설기는 엄마가 이혼하며 사춘기 막내딸이 걱정되어 데리고 왔다. 쌀가루 같은 눈이 내리던 겨울, 정작 식구들의 안중에 없어 개는 거실서 혼자 떨며 낑낑댔다. 세미는 부모의 불화가 제 탓인 양 애썼으나 금세 녹아 때 묻는 눈처럼 허사였고 결국 부-모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일기에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누가 날 사랑하면 그 사람을 나쁘고 나쁘게 해칠 것이다”와 같은 말을 꽂을 때, 개가 세미의 방 문간에서 퉁퉁 부은 세미를 보고 있었다. 공연히와 우연히 사이 어디께의 인과랄까.
설기 없는 세미는 반려견과 행복하게 지내는 옛 직장 동료나 이웃을 새삼 만나본다. 처음 맛보는 육즙 가득한 족발 뼈다귀에 호두가 흥분해 한 시간 넘게 빨고 핥다 혀가 경직돼 응급실에 갔다는 직장 동료의 추억, “어린 강아지라서 나 죽을 때까지 얘가 안 죽으면 어떡”하냐 애태우는 가게 주인, 설기까지 선명히 기억하며 자신을 반겨주는 중학생 때 동네 공부방 선생님 등을 만나며 세미는 깨닫는다. “이상하지. 당신 개 좀 보자고 해서 사람들을 만나면 자꾸 내 얘기를 듣게 돼. 나라는 인간이 분명해져.”
그러니 세미는 ‘세미’와 작별하지 않는다. 공연히 설기를 보내지 않는다. 올해 크리스마스가 그러하니 내년 크리스마스도 그럴 텐데, 우연히도 올해 세미가 내년 세미는 아닐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들뿐인데 모두가 불행해지는 도시의 삼각관계가 저주는 아니듯, “세상에 안 변하고 가만 있는 것도 있”다는 사례로서의 세미와 설기 같은 관계도 기적이랄 게 없다. 이번 연작에서 단 하나 꼽으라면 서슴지 않을 작품.
웃음 많은, 식물성 냉소주의자 김금희는 24일 <한겨레>에 “2019년 ‘크리스마스에는’을 쓰고 주목하지 않았던 인물, 아예 등장하지도 않았던 인물들이 나타나 내 인생 여기 있다고 얘기해 붙든 게 지난 3년”이라며 “성탄절과 연말 겨울은 정신적 상업적 그러니까 성(聖)과 속(俗) 양편에서 환영받고 죽음, 소멸과도 가까운 시기로 그 교차로에서 삶을 돌아볼 수밖에 없는 그러면서 그 작은 일상을 초월하는 순간이 얼마나 가치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12월이 긴 달이라 얼마나 다행인가.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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