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후] 복지부동, 가장 효과적인 사보타주/강국진 정치부 차장

강국진 2022. 11. 25.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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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속한 의사결정을 피하고 항상 '정식 절차'를 거치도록 한다.

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을 때는 회의를 연다.

그는 "일을 열심히 하면 지적받을 것도 많아진다. 내가 주도한 일 때문에 다른 공무원들에게 불이익이 갈까 항상 신경쓰인다"며 "피감기관이 보기엔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다. 지적사항이 나올 때까지 뒤진다"고 털어놨다.

문재인 정부가 한일 관계 정상화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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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국진 정치부 차장

신속한 의사결정을 피하고 항상 ‘정식 절차’를 거치도록 한다. 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을 때는 회의를 연다. 회의에선 ‘라떼는 말이야’로 이어지는 일장연설을 늘어놓고 상관없는 주제를 끊임없이 꺼낸다. 정확한 단어 선택을 두고 실랑이를 벌인다. 덜 중요한 일을 먼저 처리하게 하고, 중요하지 않은 일에 완벽한 일처리를 명령한다. 한 명이 결정해도 되는 일도 여러 사람이 승인을 하도록 한다.

누구나 주변의 이런 사람 하나쯤은 알고 있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이 조직을 이끄는 자리에 있다면 그 조직이 엉망진창이 되는 건 시간문제다. 하지만 만약 조직을 망치는 게 그 사람의 목적이라면? 위에서 언급한 내용들은 사실 미국 중앙정보국(CIA) 전신인 전략사무국(OSS)이 1944년에 펴낸 ‘사보타주(파괴공작) 현장교본’에 등장하는 ‘티 안 나게 적 조직을 무너뜨리는 방법’을 2022년에 맞게 살짝 각색한 것이다.

미 국토안보부 누리집에서 손쉽게 내려받을 수 있는 이 짤막한 현장교본을 틈날 때마다 들춰 보며 두 가지를 떠올린다. 하나는 분류 범주가 ‘사보타주 예방’으로 돼 있다는 점이다. 적국을 내부에서 무너뜨리는 최종 병기가 “비효율적인 직원에게 상냥하게 대하고 부당하게 승진시킬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우리는 그 반대 방향으로 행동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또 하나는 정부를 내부에서 무너뜨리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복지부동’이라는 교훈이다.

친하게 지내는 공무원이 있다. 단체장 앞에서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이 분도 감사를 받을 때는 긴장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는 “일을 열심히 하면 지적받을 것도 많아진다. 내가 주도한 일 때문에 다른 공무원들에게 불이익이 갈까 항상 신경쓰인다”며 “피감기관이 보기엔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다. 지적사항이 나올 때까지 뒤진다”고 털어놨다. 물론 해법은 있다. 그는 “규정에 없는 건 안 하면 된다. 새로운 일을 만들지만 않으면 감사원이 수백 번 찾아와도 겁날 게 없다”며 쓴웃음을 짓는다.

지자체 공무원들이 복지부동하면 그 피해는 결국 주민들에게 돌아간다. 국가안보 분야에서는 어떨까. 외교안보 쪽 연구기관에서 일하는 A씨는 요즘 감사에 불려다니느라 연구를 제대로 못 하고 있다. 그는 “내가 이러려고 밤 새워 가며 청와대(현 대통령실)와 국정원에 현안 자문을 해 줬나 자괴감이 든다”며 씁쓸해한다.

최근 만난 한 공무원은 “서욱 전 국방부 장관이 국가안보 현안에 대한 판단 때문에 구속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며 “정부가 공무원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시키는 건가”라고 반문했다. 한 국회 관계자는 “공무원들이 국정과제 사업조차 예산 확보에 의욕을 보이지 않는다”며 “지금 국정과제가 다음엔 감사 대상이라는 학습효과”라고 꼬집었다.

한일 관계와 관련해 문재인 정부 관계자들이 감사나 수사를 받는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 없다. 문재인 정부가 한일 관계 정상화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5년 뒤 감사와 수사를 받아야 한다면 어느 공무원이 강제동원 판결 문제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문제를 두고 적극적으로 대일 협상에 나설까 궁금하다.

최근 일본에서 열린 국제 관함식 참석 결정을 내린 해군 관계자들이 5년 뒤 ‘친일파’라느니 ‘토착왜구’라며 조리돌림을 당한다면 제대로 된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공무원에게 복지부동을 강요하지 말자. 국익을 위해서.

강국진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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