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동치미를 담그며
한 달여 비워둔 집
엉거주춤 남의 집인 양 들어서는데 마실 다녀오던
아랫집 어머니가 당신 집처럼 마당으로 성큼 들어와
꼬옥 안아주신다 괜찮을 거라고
아파서 먼 길 다녀온 걸 어찌 아시고 걱정마라고,
우덜이 다 뽑아 김치 담았다고 얼까 봐
남은 무는 항아리 속에 넣었다고
가리키는 손길 따라 평상을 살펴보니, 알타리 김치통 옆에 늙은 호박들 펑퍼짐하게 서로 기대어 앉아있고, 항아리 속엔 희푸른 무가 가득, 키 낮은 줄엔 무청이 나란히 매달려 있다. 삐이이 짹짹, 참새떼가 몇 번 나뭇가지 옮겨 앉는 사이, 앞집 어머니와 옆집 어머니도 기웃하더니 우리 집 마당이 금세 방앗간이 되었다. 둥근 스뎅 그릇 속 하얗고 푸른 동치미와 살얼음 든 연시와 아랫집 메주가 같이 숨 쉬는 평상, 이웃들 손길 닿은 자리마다 흥성스러운 지금은, 입동 지나 소설로 가는 길목
나 이곳 떠나 다른 세상 도착할 때도
지금은 잊어버린,
먹고사느라 잊고 사는,
옛날 내 이웃들 맨발로 뛰쳐나와
아고 내 새끼 할 것 같다 울엄마처럼 덥석 안고
고생 많았다 머나먼 길 댕겨오니라,
토닥토닥 등 두드려 줄 것 같다
참새떼처럼 명랑하게 맞아줄 것 같다
- 시 ‘이웃들’ 김해자, 시집 <해피랜드>
친구들이 동치미 담으러 온다는 약속을 하고부터 마음이 자꾸 밭으로 갔다. 옥수수와 고구마 캐고 난 밭에 알타리와 무씨를 심었는데, 아무래도 며칠 늦은 것 같다. 중간중간 솎아 먹어도 되니 촘촘히 심으라는 이웃 고수의 말을 따랐는데, 몇 번 솎아냈는데도 여전히 무 사이가 가까운 듯했다. 1박2일 동안 언제 뽑아서 씻어서 소금에 굴려 동치미를 담겠나 싶어, 우선 큰 무만 뽑기 시작했다. 며칠 물 더 빨아먹고 햇볕 쪼이면 장딴지만 해질 텐데…. 머릿속 계산과 달리 손은 과감했다.
무씨를 땅에 묻고 가물 때 물 몇 번 준 일밖에 없는데 그새 이리 자라다니…, 대견하고 고마웠다. 무를 옮겨다 수돗가에서 씻어서 채반에 두니 자꾸만 바라봐졌다. 연둣빛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무청이 달린 머리 쪽도 이쁘고, 잔뿌리 몇 달린 하얀 부분도 백옥 같다. 정갈하고 작은 무들이 서로 포개고 누운 모습을 보니, 어릴 때 밖에서 놀다 오면, 먼지 뒤집어쓰고 온 내 귀 잡고 얼굴 뿌득뿌득 문지르던 엄마 생각이 난다. “자 코 흥” 하면 나도 “흥” 하며 코를 풀었다. 수건으로 닦아주고 나서 “깎은 밤 같네” “씻은 무 같네” 하던 웃음 섞인 말과 함께.
무가 제아무리 예뻐도 동치미는 담가야 한다. 소금에 굴리고 쪽파와 갓을 다듬어서 친구들 숫자만큼 4통의 동치미를 끝낸 지 이틀 후, 이웃 언니가 큰 무 20개와 속이 꽉 찬 배추 10포기를 주었다. 우리 무 100개보다 무거웠다. 이번엔 ‘배추 무 동치미’를 담기로 했다. 무 5개 깔고, 절인 배추 올리고, 사이에 갓과 파 넣고 다시 무 올리고 배추겉잎으로 덮었다. 삭힌 고추와 말린 고추와 대추 올리고, 소금물 붓고, 백김치처럼 담았다. 마늘 생강 청각 넣은 베보자기를 여며서 항아리 앞으로 막 가는데, 아랫집 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무 가져가라”고. “무 몇 개 신문에 싸놨다 겨울 내 먹으라고” 주고 싶은 마음으로 챙겨놨는데 무 많다고, 허리 좀 아프다고 거절할 수는 없었다. 이웃들 덕에 3차는 정통 무 동치미가 되었다. 아주 큰 무는 바람 안 들어가게 신문지에 싸고 재활용 용도로 씻어놓은 비닐에 하나씩 넣어 박스에 보관했다. 이웃들 덕에 팔다리 허리는 고생했지만 올 동치미는 풍년이다. 그중 5분의 4는 ‘공생’이라는 협동조합을 운영하며, 반찬 만들어 후배들 밥 먹이고 도시락 싸주는, 동지이자 언니이자 친구인 이미혜에게 줄 생각이다. 무는 무(無), 내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무는 무우(無憂)이기도 하다. 걱정 좀 덜 하고 오늘 하루 잘 살라는 기원을 담아, 이웃들이 나를 통해 전해주는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김해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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