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훈의 어텐션] 500만원짜리 중고 티셔츠

김도훈 문화 칼럼니스트 2022. 11. 25.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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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양진경

라프 시몬스가 문을 닫았다. 이 문장을 보는 순간 당신은 생각할 것이다. 라프 시몬스가 대체 누군가. 아니다. 라프 시몬스는 시몬스 침대를 만든 사람이 아니다. 그는 패션 디자이너다. 이 문장을 보는 순간 당신은 이 글을 그냥 지나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패션에 딱히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디자이너 이름까지 외우며 세상을 살아가지는 않는다.

패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라프 시몬스라는 이름만 들어도 벨기에 방향으로 큰절을 올리고 싶어질 것이다. 그는 패션계의 스티브 잡스다. 패션계 사람들이 들으면 ‘어쩜 이렇게 구린 비유를 하느냐”고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패션에 관심 없는 독자들에게 라프 시몬스를 설명하려 몹시 애를 쓰는 중이다. 좀 비약적인 비유라도 해야만 이 글은 끝까지 읽힐 것이다.

라프 시몬스는 1995년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만들면서 패션계에 뛰어들었다. 그의 브랜드는 곧 종교적인 인기를 끌었다. 요즘은 유명 명품 브랜드도 젊은 문화, 이른바 유스 컬처(Youth Culture)를 반영한 아이템을 생산한다. 그 시절은 달랐다. 1990년대 명품 브랜드는 아직 어른들의 명품에 머물고 있었다. 라프 시몬스는 경계를 무너뜨렸다. 문구나 사진이 프린트된 티셔츠, 맨투맨 같은 것은 이전에는 명품 브랜드의 아이템이 아니었다. 라프 시몬스는 당신의 중학생 아들이 30만원이 넘는 티셔츠를 사달라고 갤러리아 백화점 바닥에 누워 떼를 쓰는 이유의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다.

라프 시몬스는 지난 11월 22일 25년간 꾸려온 브랜드 ‘라프 시몬스’를 끝내기로 했다. 정확한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질 샌더, 디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했다. 지금은 프라다를 이끌고 있다. 아마도 그는 조금 지겨워졌을 것이다. 그가 잘하던 것은 많은 후배 디자이너가 해내고 있다. 어떤 챕터는 스스로 문을 닫아야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법이다.

나는 십여 년 전 베를린에서 2002년 생산된 라프 시몬스 맨투맨을 샀다. 50만원이 넘는 가격이었다. 지금 그건 500만원 넘는 가격에 팔린다. 브랜드가 끝났으니 더 오를 것이다. 합리적인 투자였다. 그렇다. 나는 이 글을 다 해진 중고 맨투맨 따위를 호들갑스러운 가격에 구입하는 아들의 소비에 치를 떠는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쓰고 있다. 패션에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 한 디자이너의 가치를 가장 빠르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역시 자본주의적 설명이 최고다.

나는 지금도 라프 시몬스의 지난 컬렉션 제품을 구입하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고 있다. ‘샤테크(샤넬 재테크)’를 넘어서는 ‘라테크’라고 스스로를 현혹하면서 말이다. 어쩌면 당신은 이제야 구글로 라프 시몬스라는 이름을 한번 검색해 볼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한 산업의 얼굴을 통째로 바꾼 낯선 혁신가의 이름을 소개하려는 이 글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한 것이다.

김도훈 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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