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對中 매파’ 펠로시의 30년 뚝심

채성진 국제부 차장 2022. 11. 2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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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초년 때 ‘천안문 추모’ 계기
中 반인권 비판 30여 년 이어가
우리 국회엔 보스 추종자들만
北 인권 위해 무슨 노력 하나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이 지난 11월 17일 미 하원 연설에서 내년 1월 개원하는 다음 의회에서 당 지도부 선거에 나서지 않겠다고 선언했다./AFP 연합뉴스

이달 초 중간선거에서 당선돼 19선(選)에 성공한 낸시 펠로시 미 연방 하원의장은 20년간 지켜온 의장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최근 밝혔다. 의회 내 대표적인 ‘대중(對中) 매파’인 그는 지난 8월 대만 방문을 강행하며 전 세계 이목을 집중시켰다. ‘하나의 중국’ 원칙을 훼손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며 중국이 대놓고 으름장을 놨지만, 펠로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칫 무력 충돌까지 우려되던 당시, 56초짜리 동영상 하나가 주목을 받았다. 천안문 사태 2년 뒤인 1991년 펠로시가 베이징 천안문 광장을 예고 없이 찾아 민주화 시위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성명을 낭독하는 장면을 담은 것이다. 펠로시는 며칠 전 팔순을 맞은 조 바이든 대통령보다 두 살 많은 역전의 노장이지만, 동영상에선 바짝 긴장한 50대 초반 정치 초년병 모습을 볼 수 있다. 중국의 서슬 퍼런 감시를 뚫고 동료 의원 두 명과 ‘민주화 성지’를 찾은 그는 흰색 꽃 한 송이를 들고 ‘중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라는 글귀가 적힌 검은색 플래카드를 펼쳤다. 이들을 제지하는 공안의 당황한 표정이 인상적이다.

낸시 펠로시(가운데) 미국 하원의원이 1991년 동료 의원 두 명과 함께 중국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중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꺼내들었다. /미국 하원의장실

펠로시는 정치 인생을 관통한 반중(反中) 신념이 자리 잡은 계기를 자서전 ‘자신의 숨겨진 힘을 깨달아라(Know Your Power)’에서 설명했다. ‘미국의 딸들에게 주는 메시지’라는 부제를 달고, 사상 첫 여성 하원의장에 오르며 ‘유리천장’보다 더 견고한 ‘대리석 천장(marble ceiling)’을 깨뜨린 선배의 경험과 고언(苦言)을 전한 책이다.

미국 동부 볼티모어 출신이지만 결혼 후 서부로 이주해 47세에 샌프란시스코 하원의원에 당선된 펠로시는 지역구 차이나타운에서 벌어지던 중국인들의 민주화 시위에 주목했다. 그는 학생 비자를 받아 미국으로 탈출한 천안문 시위 참가자를 보호하겠다는 책임감을 강하게 느꼈다고 회고했다. 이들이 안전하게 귀향할 수 있을 때까지 미국 체류를 허용하는 법안을 우여곡절 끝에 통과시키며, 비로소 의원이 된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천안문 추모’ 이후 펠로시는 티베트 독립운동가 달라이 라마를 만났고, 베이징올림픽 유치에 반대하며 중국의 반인권 행태에 대립각을 세웠다. 홍콩 민주화 시위 지도부를 직접 찾아갔고, 신장 위구르족 인권 문제도 끈질기게 지적하고 있다. 그 어느 곳보다 당파성이 강한 미 의회이지만, 중국을 견제하는행보에서만큼은 좌우를 따지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펠로시는 책상에 액자 두 개를 두었다고 했다. 천안문 광장에서 플래카드를 펼치는 장면과 ‘신은 우리에게 성공을 요구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노력하기를 바라실 뿐’이라는 테레사 수녀의 말씀을 담은 것이다.

공세적이고 비타협적인 그의 대중 행보에 대해선 비판이 적지 않다. “정치적 몸집을 키우려 인권을 활용한다” “쇼맨십에 불과하다”는 원색적인 비난부터 “우크라이나전 등으로 가뜩이나 국제 정세가 불안정한데 무책임한 돌출 행동으로 중국을 자극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하지만 30년 넘게 한결같은 뚝심만큼은 인정할 만하다.

펠로시가 몸담은 곳과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여의도 어느 정당에도 정치 초년병들이 많이 있다. 그 당의 강령에는 ‘북한 주민의 인권 증진과 삶의 질 개선을 위해 적극 노력한다’는 대목이 있다. 과문한 탓인지 긴 안목으로 이를 치열하게 실천하는 이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보스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으로 떼 지어 다니는 군상(群像)만 눈에 띈다. 시시각각 변하는 정치 풍향계를 바삐 쳐다보기에 앞서 ‘절대 신념을 잃지 마라(Never Lose Faith)’는 펠로시의 자서전 첫 장 제목을 곱씹어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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