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국의 우리문화 들배지기] 밖에서 보는 우리의 속
“나는 가슴이 두근거려요. 가르쳐 드릴까요. 열일곱 살이에요. 가만히 가만히 오세요. 요리조리로….” 전시장에는 박단마(朴丹馬)의 1938년 유성기판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이 극에 달할 때에 요즈음 걸그룹 같은 박단마의 인기절정의 사랑노래다. 지금 미국 LA카운티뮤지엄(LACMA·라크마)에서 ‘한국 미술의 근대 - 사이의 공간 The Space Between’과 ‘박대성 - 생명의 필묵 Virtuous Ink and Contemporary Brush’가 나란히 열리고 있다. 전자가 유화·사진·조각 130점이고, 후자는 초대형 필묵 작품 8점인데, 이런 대칭적인 전시구도로 서울에서는 열린 적이 없다. 이미 한국은 서화에서 미술로 예술의 판도가 뒤집어졌고, 사진은 여전히 미술의 마이너로 취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국의 근대는 36년의 일제강점과 6·25전쟁으로 망국과 분단으로 점철된 만큼 우리 뇌리에는 서구미술이 전통서화를 밀쳐냈고, 전통이 빠진 미술 또한 정체성이 혼란스러운 것으로 각인되어 있다. 서구모방시대로 간주된 나머지 부끄럽고 덮어두어야 할 공간이 근대였다.
이에 대해 두 전시를 기획한 버지니아 문은 “와이 낫?” 하면서 “두 번의 전쟁으로 상처투성이로만 인식된 한국 근대는 오히려 ‘리질리언스(resilience·회복력)가 충만한’ 공간”이라고 말한다. 한국 미술에서 뒷방 신세인 필묵 또한 “박대성을 통해 기계시대를 품어낼 높은 덕성을 가진 당대 미술로 다시 불러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라크마가 발견해낸 한국 근대는 어느 때에도 없었던 독자공간이자 전통과 현대를 연결하는 골든 브리지로 다가온다.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면 고종황제를 사진으로 만나는 것 자체가 한국 근대임을 알게 한다. 조선시대에 없었던 것이 카메라였고,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전후의 세상물정은 필묵이나 유화의 사의(寫意)와도 차원이 다르게 카메라가 정직하게 찍어내고 있다. 외눈박이 유화는 라크마에서 사진을 만나 서로 마주 보며 한국 근대를 노래하고 있다.
임응식의 ‘구직’(1954)과 한영수의 ‘서울 명동’(1956)이 전쟁 이후 삶의 명암을 극적으로 찍어낸다면, 이쾌대의 ‘군상Ⅳ’(1948)와 김환기의 ‘항아리와 여인들’(1951)은 좌우익 대립의 혼돈 속에서 구원의 열망과 피란길의 희망을 그려낸다. 이인성의 ‘경주의 산곡에서’(1934)와 백남순의 ‘파라다이스’(1936)에서는 식민지시대 잃어버린 실존의 낙원과 되찾아야 할 꿈속의 낙원을 본다. 더 나아가서 사진·조각·유화가 총동원되어 그려낸 자화상과 여성, 군상의 얼굴을 마주하면서 이번 전시는 한국 근대의 인물열전을 방불케 한다. 새로운 주체를 세우는 우뢰보다 더 큰 침묵의 자화상들이 전시장을 꽝꽝 울린다. 하지만 암흑 속의 묵시(默示)는 신낙균의 ‘최승희 초상’(1930)의 수줍음과 한영수의 ‘서울 만리동, 1959’의 해맑게 터지는 아이의 미소 속에서 먼저 들린다. 새기고 찍고 그려낸 한국 근대는 라크마에서 어둠에서 생명공간으로 자리매김된다.
이런 맥락에서 라크마는 한국 미술의 잃어버린 반쪽을 박대성의 필묵으로 건져내고 있다. 그것도 먹과 붓을 ‘덕(Virtuous)’과 ‘당대(Contemporary)’로 소환하면서 오일 브러시 캔버스로는 대체 불가능한 지필묵이라는 물질의 심원한 정신성까지 간파해낸다. 이번 전시 주제작으로 잡아낸 ‘불국설경’(1996)만 봐도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그 이면의 보이지 않는 화엄세계를 극적으로 필획해내고 있다. 10m가 넘는 초대형 화선지에 그려진 눈 내린 불국사는 먹 반 종이 반이지만 그냥 블랙 앤드 화이트가 아니다. 필획과 필획 사이 여백의 기운은 화선지를 뛰쳐나와 전시공간 전부를 생명의 에너지로 꽉 채워낸다. 급기야는 보는 사람들을 니르바나, 즉 피안의 세계로 인도한다. 여기서 작가 자신의 전쟁 트라우마는 필묵으로 눈 녹듯 녹여내고, 급기야 분단과 이데올로기 충돌이라는 우리 모두의 고(苦)를 화(和)로 승화시켜낸다. 필묵이 기계시대, 기후변화시대 진정한 ‘회복력’이 되는 이유를 한국이 아니라 미국에서 확인한다.
이동국 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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