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시가 ‘금수저’ 전형이라고? 재력 따라 유불리 갈리는 건 정시![기울어진 운동장, 대입 교육]
입시비리 터질 때마다 “정시 확대”
서울 주요 대학들 40%까지 늘려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일대 건물 10곳은 최소 130개에 달하는 대학 입시 학원들로 빼곡하다. 대치동 학군 아파트를 상징하는 ‘은마아파트’ 내 종합상가에는 상가 한 층에만 40개에 가까운 학원이 들어섰다. ‘국어·영어·수학’ 학원 비중이 족히 90%가 넘었다. 대치동 일대에서 대학 입시 학원을 운영하는 5명에게 ‘요즘의 입시 트랜드’를 묻자 모두 ‘정시’라고 답했다. 한 사교육업자는 “요즘은 정시 위주로 준비하는 학생들이 우수한 학생이고, 정시 준비에 전념하는 학교가 좋은 고등학교라고 평가받는다”고 했다.
‘정시 확대’의 시기가 시작됐다. 올해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가 발표한 ‘2023학년도 대학입학전형시행계획’에 따르면 올해 서울 16개 주요 대학의 정시 선발 비율이 40% 이상으로 증가했다. 대입 모집 인원 증가분 2571명 중 수도권 정시 모집 증가분이 825명이다.
정시 비율이 확대된 배경에는 고위공직자 자녀들의 ‘입시비리’ 논란이 있다. 문재인 정부는 2019년 무렵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자녀를 둘러싼 입시비리 의혹이 불거진 이후 ‘대입제도 공정성 강화 방안’의 일환으로 정시 비중 확대를 제시했다. 그 결과 서울 주요 대학의 정시 비중은 40%까지 확대됐다. 윤석열 정부는 일단 이 비율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도 ‘부모 찬스 없는 공정한 대입제도를 만들겠다’며 정시 확대를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사교육 증가’ 등의 이유로 국정과제 이행계획서에는 포함하지 않았다.
입시비리 논란이 터질 때마다 대안은 정시 확대였다. 과연 정시는 수시보다 입시의 ‘공정성’을 담보하는 제도일까. 24일 경향신문은 지식콘텐츠 스타트업 ‘언더스코어’, 사회과학 분야 연구자들의 모임 ‘불평등연구회’와 함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정시·수시와 사회경제적 지위의 연관성을 분석했다. 누가 정시를 선호하고, 누가 이 시험에서 우위를 점하는지 살펴봤다.
정시와 ‘자본’의 상관관계
‘대학 입시에서 면접이나 논술 시험보다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과 같은 시험을 통한 선발이 더 공정할까?’ 여론조사기관 한국갤럽은 언더스코어의 의뢰로 지난 1월13일부터 17일까지 5일간 성인 남녀 15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국민사회인식조사’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조사 결과 ‘다소 그렇다’는 답변이 39%로 가장 높았다. ‘보통’은 27.1%, ‘(정시의 공정성에) 매우 동의한다’는 답변은 19.4%로 뒤를 이었다. 수시보다 정시에 대한 신뢰도가 응답 전반에서 높았다.
정시에 대한 높은 선호도는 역대 정부에서 되풀이된 입시비리 영향으로 풀이된다. 최서원씨(개명 전 최순실) 딸 정유라씨의 이화여대 ‘부정 입학’ 사건, 조국 전 장관 자녀의 입시비리 사건, 기타 고위공직자 자녀들의 입시스캔들이 ‘수시 전형’에 대한 신뢰도를 깎았다. 2017학년도 입시에서 29.4%에 불과했던 정시 모집 정원 비율은 현재 서울 주요 대학에서 40%까지 치솟았다.
정시를 선호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정시 선호’자들의 소득을 분석하자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을수록 정시를 선호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가구별 소득과 정시 선호도가 비례하는 것이다. 월평균 가구 소득 300만원 미만 저소득층일수록 ‘수능(정시)을 통한 선발’이 불공정하다고 답했다. 월평균 가구 소득 1000만원 이상인 가정의 정시 선호도가 가장 높았다.
학교활동 위주 평가인 수시에 비해
정시는 사교육 받는 학생이 유리
고학력·고소득층일수록 정시 선호
학력 수준도 무관하지 않다. 서울 4년제 대학을 나오거나 대학원을 나온 고학력자일수록 수능을 통한 선발이 더 공정하다고 답했다. 이러한 효과는 연령, 성별, 거주지, 결혼여부, 고용상태 등 다양한 요인들을 통제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소위 ‘잘사는 집’ 자녀이거나 고학력자일수록 정시 선호 경향이 뚜렷했다.
이런 분석 결과는 교육 분야 연구자들의 연구와도 궤를 같이한다. 스스로를 어느 계층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나타내는 ‘계층 의식’이 상층일수록 정시를, 하층일수록 수시(학생부종합전형)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문정주·최율, “배제의 법칙으로서의 입시제도: 사회적 계층 수준에 따른 대학 입시제도 인식 분석”, 2019)
이 연구에 따르면 스스로를 ‘저소득층’이라고 생각하는 집단의 정시 선호도는 수시 선호도보다 3.6%포인트 높았다. 계층 의식이 고소득층인 집단에선 이 격차가 19.9%포인트까지 벌어졌다. 최율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주관적 계층이든 객관적 계층이든 고소득일수록 정시를 선호한다”며 “수시를 ‘금수저 전형’이라 하는 일반 담론과 배치된다”고 말했다.
수시와 정시 비율을 조정해도 소득 하위계층의 입시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연구도 있다. 같은 연구팀의 석사논문 ‘입시제도 변화에 따른 사회적 계층 간 교육성취 차이 분석’(원동휘, 2021)은 2004~2013년 10년을 정시 우세기(2004~2006), 과도기(2007~2009), 수시 우세기(2009~2013)로 나눠 분석했다. 대졸자직업이동경로조사(GOMS)가 활용됐다. 소득 하위 50%에서는 세 시기에서 상위권 대학 입학률에 차이가 없었다. 반면 소득 상위 10~30%의 ‘중상위층’과 소득 상위 10% 이상의 ‘최상위층’에서는 희비가 뚜렷하게 갈렸다. 수시 우세기로 갈수록 중상위층에서는 상위권 대학 입학률이 떨어졌고 상위층에서는 높아졌다. ‘수시냐, 정시냐’는 상하위 계층 간 문제가 아니라 상위층과 중상위층 간 문제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최 교수는 “이 역시 담론과 현실의 괴리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수시=금수저 전형’이라는 오명을 벗을 때가 됐다는 주장도 나온다. 내년부터 수시 전형에서 자기소개서와 추천서를 포함한 대부분의 비교과 항목이 빠지기 때문이다. 서울 4년제 주요 대학에서 입학사정관을 지낸 A교수는 “정시는 수시와 달리 학생의 역량이나 환경 등 모든 맥락이 제거돼 있어서 사교육을 비롯한 자본의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며 “최근 수시 전형이 학생들의 정보를 볼 수 없게 하는 블라인드 전형으로 진행되는 점을 고려해 두 입시 전형의 적절한 조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재수 응시자들도 ‘부모의 영향’을 받을까?
정시에서 유리하다고 알려진 ‘재수생’의 경우는 어떨까. 지역별, 출신 학교별 정시 선호 경향은 학생들의 ‘재수 응시 확률’을 통해 볼 수 있다.
경향신문은 최성수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부교수 연구팀의 ‘특권화된 실패: 대학 입시제도의 변화와 대입 재수의 사회경제적 불평등’ 미공개 연구 결과를 입수했다. 최 교수는 2008년부터 2019년까지 대학졸업자 ‘직업이동경로조사’를 분석해 지역별, 소득분위별, 출신 고등학교별로 재수 응시 확률에 어떤 차이가 발생하는지 분석했다.
연구에 따르면 서울 강남구뿐 아니라 수도권에 거주할수록, 특수목적고(특목고) 출신일수록 재수를 택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서울 강남·서초·송파·양천구 거주 학생들이 서울 강북 지역에 거주하는 학생들보다 재수 응시 확률이 높았다. 강남구에 거주하는 학생들이 서울 타 지역 학생들 대비 재수 응시 확률이 5%포인트 더 높았다. 서울과 지방 간 격차도 컸다. 7개 광역자치단체시를 제외한 지방에 거주하는 학생들의 재수 응시 확률은 서울(비강남)보다 15%포인트 가까이 낮았다. 학교별 차이도 두드러졌다. 외고·과학고·국제고·자율형사립고·자율형공립고를 포함한 ‘특수고’ 출신 학생들은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 학생보다 재수 비율이 4%포인트 높았다. 지난 17일 치러진 2023학년도 수능에는 전체 50만8000여명의 응시자 중 졸업생과 검정고시생, 즉 n수생 비중이 26년 만에 가장 많은 31%를 차지했다. 대학별 정시 모집 인원과 n수생 응시 비율이 비례한 셈이다.
최 교수는 “2008년부터 2019년까지의 데이터를 보면, 시기가 최근일수록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은 집안의 학생들이 재수로 좋은 대학에 진입하는 경향이 더 두드러진다”며 “재수 응시를 염두에 둔 입시 전략은 상대적으로 성적이 낮지만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은 고학력·고소득 집안 자녀들에게서 나타날 확률이 높아 보인다”고 분석했다.
정시 확대 기조에 이원화되는 고등학교
입시 전문가들은 정시 확대로 수도권과 지역 소재 학교별 입시 전략이 이원화됐다고 말한다. 사교육이나 입시 정보를 접하기 용이한 수도권 학교일수록 정시 쏠림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정시 비중이 늘면서) 서울권 학생들은 수능을 집중적으로 준비하는 패턴으로 바뀌었고, 지방 소재 학생들은 학교 내신만 관리하는 등 준비 방식이 지역에 따라 이원화되고 있는 추세”라며 “특목고나 자사고 등 학군이 좋은 상위권 일반고 같은 경우 수능 준비 비중이 예전에 비해 2~3배 높아졌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수도권 고교에서 정시 쏠림 심화
중3 학생 대부분 고교 선택할 때
내신보다 수능 준비 편한 곳 택해
정시 확대가 특수고 지원율 증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임 대표는 “정시 비중이 늘면서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은 고등학교를 선택할 때 내신을 잘 받을 수 있는 곳보다 수능 준비를 잘할 수 있는 고등학교를 선택하고 있다”면서 “지난해에 비해 올해의 특목고, 자사고 선택 비중이 좀 더 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는 2025학년도부터 자사고·외고를 일반고로 전환하기로 했지만 윤석열 정부는 자사고 존치를 국정과제로 정한 상태다. 외고 역시 존치 방안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선 고교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가구 소득이 중·하위층에 위치한 학생들이 서울 강남구 일대에서 값비싼 사교육을 받는 학생들과 공정한 정시 경쟁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울 동대문구 소재 고등학교 교사 B씨는 “특목고가 아니고서야 학교 교육과정만으로 수능을 준비할 수가 없다”며 “정시와 사교육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된 만큼 공정한 시험이라고 볼 수 없다. (학생들마다) 출발선 자체가 다르다”고 했다.
대구의 한 고등학교 교장 C씨도 “우리 학교의 경우에는 개인 역량이 높지만 고액 과외를 받기가 어려운 학생들이 많다”며 “이 학생들은 사교육이 병행되는 정시보다 학교 활동 위주의 수시에 집중하고 있는데, 수시 비율이 줄어들면 학생들이 펼칠 수 있는 잠재적 역량의 폭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 학교는 사교육을 받기 어려운 학생들이 수시 전형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학내 프로그램을 확대 운영하고 있다.
일반고 과정만으론 대비 불충분
현실 이런데 정시 확대가 답인가
공정한 대학 입시 정책이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누구를, 무엇을 위한 공정성인가’를 짚는 게 우선이라고 조언한다. 계봉오 국민대학교 사회과학대 교수는 “입시정책을 구성할 때 누구를 위한 공정성인지 명확하게 짚고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며 “학생들이 서울 최상위권에 가기 위한 것이 공정인지, 지역 학생들을 중심으로 대학 입시 문턱을 낮출 것인지 고려하고 살펴봐야 한다”고 했다. 입시정책이 어떻게 바뀌든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을수록 제도 변화에 더 빠르게 적응한다는 점, 최상위권 학생들과 중하위권 학생들의 ‘입시 공정성’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는 2025년 전국 고등학교에 고교학점제가 전면 도입된다. 교육계에서는 국어·영어·수학 등 주요 교과목의 비중을 높이는 정시 비중 확대 정책이 고교학점제와 상충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의 대표적인 자사고인 하나고 교사 전경원 경기도청 교육정책자문관은 “고교학점제 방식, 즉 학생들이 원하는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선택형 교육과정이 전면 도입되면 오히려 수시에 적합한 학생들이 늘어날 확률이 높다”며 “수능은 이 학생이 대학에서 공부를 할 수 있는지 정도의 척도로만 두고 학생의 역량을 충분히 반영할 수 있도록 서술·논술형 시험체계로 개편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국내 수시 전형은 점차 학생부만을 고려하는 표준화 정책으로 가고 있다”며 “수시와 정시를 접목시켜 한국식 대학 입시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강연주·유경선·최서은 기자 pla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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