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기자생활] 내년엔 사람 많은 데서 놀아야지

이우연 2022. 11. 24.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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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기자생활][이태원 참사]슬기로운

기자생활

지난 10일 오전 서울 마포구의 한 골목에 군중 안전을 위한 표지판 도입을 촉구하며 이제석 광고연구소 관계자들이 설치한 안전 표지판 뒤로 시민들이 이동하고 있다. 이제석 광고연구소는 이번 이태원 참사를 계기로 인파가 몰리는 협소 지역을 대상으로 군중 안전 관련 표지판의 개발과 도입을 각 지자체, 국토교통부 등에 공문을 통해 요구할 계획이라 밝혔다. 연합뉴스

이우연

이슈팀 기자

고등학생 시절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휴대전화도 사용하지 못하던 그 시절 자습실에서 공부하기 싫을 때마다 대학생이 되면 해보고 싶은 일의 목록을 써 내려갔다. ‘록페스티벌에 가기, 대학교 축제에서 놀기, 놀이공원 가기, 홍대 길거리에서 밤새 술 마시고 놀기, 이태원 클럽 가보기, 크리스마스 때 명동 가기, 아이돌 공연 보러 가기….’ 몇달 전 방에서 발견한 일기장에 적혀 있던 목록 일부다. 그 시절 나는 군중이 몰린 기사 사진을 보면 막연히 ‘어른이 되면 이렇게 놀 거야’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적어놓은 것들도 온통 사람 많은 곳에서 놀겠다는 다짐이었다.

20대가 돼서 그때 적어놓은 목록을 모두 해냈다. 대학교 축제나 록페스티벌, 아이돌 공연장에서 사람들 사이에 끼여 ‘이러다 큰일 나겠다’는 생각을 종종 했지만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홍대나 명동에서 인파 속에 휩쓸려 다녀도 보고, 한때는 이번 압사 사고가 일어난 이태원 골목도 뻔질나게 드나들었지만 역시 별일은 없었다.

30대가 돼서는 웬만하면 사람 많은 곳에 가지 않는다. 놀기 좋아하는 성격은 그대로지만, 그렇게 노는 것이 더는 흥미롭지 않다. 대학생과 취업준비생이던 시절엔 ‘작정하고 노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학교 수업을 듣지 않을 때도 학점과 취업 걱정을 하고, 주말에는 아르바이트하느라 짬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유 시간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5년차 직장인이 되니 요란하게 노는 것에 대한 흥미가 떨어졌다. 경제력이 생긴 것도 한몫했다. 돈이 부족했던 20대 초반에는 길거리 인파 속에 섞여 노는 것이 가장 ‘가성비 좋은’ 놀이였지만, 지금은 돈을 더 써서라도 호캉스(호텔+바캉스)를 택한다. 이제 친구들과는 시끌벅적한 홍대 앞이 아닌 연희동에서, 이태원역 앞이 아닌 한남동에서 만난다.

‘기어코 이 사달이 나는구나….’ 10월29일 밤 11시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이태원에서 압사 사고 났다’는 짧은 글과 사진을 보고 처음 들었던 생각이다. 10월 초였나, 마스크를 벗은 채 열리는 올해 핼러윈이 잠시 궁금하기도 했지만 이태원에 10만명이 모일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내 포기했다. 사고가 일어나기 전날 밤, 집에 놀러 온 친구들과 “우린 이제 사람 많은 건 싫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날 밤 현장에서 늘어나는 사상자를 보면서, 참사 이후 희생자에게 쏟아지는 혐오 발언을 보면서 맨 처음 들었던 생각이 자꾸 떠올라 창피했다. 입 밖에 내지도 않았고, 아주 잠깐 스쳐갔던 생각이지만 나 또한 피해자 탓을 하는 별 볼 일 없는 어른이 된 것 같았다. ‘놀다가 생긴 일’이라는 말의 힘은 강했다. 희생자 부모들은 빈소에서 기자들에게 자신의 자녀가 얼마나 착실하고 착한 아이인지 한참 설명했다. 어떤 참사 생존자는 가족들에게조차 이태원에 간 사실을 숨긴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다.

핼러윈을 이태원에서 보낸 적 있는 2030세대를 인터뷰하자는 기사는 그런 부끄러움을 덜고 싶은 자기반성에서 시작했다. 후배 기자와 함께 이태원에서 핼러윈데이를 보냈던 시민 14명에게 ‘핼러윈과 이태원이 어떤 의미였는지’ 물었다. ‘핼러윈’이라는 열쇳말로 검색해 일면식도 없는 사람 블로그에 들어가서 무작정 인터뷰하고 싶다고 댓글을 달았다. 예상외로 많은 이들이 인터뷰에 응했다. 몇몇은 자신도 모르게 가지고 있던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어 속이 후련했다는 이야기를 인터뷰 뒤 전해 왔다.

대형재난 이후 사회는 그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이태원에서 일어난 참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방향이 ‘이제는 사람 많은 데서 놀지 마라’라는 메시지로 가서는 안 되지 않는가. 핼러윈 분장을 좋아하는 11살 자녀에게 “이제 노는 건 위험하다고 가르쳐야 하냐”던 김민영씨 말이 귓가에 맴돈다. 놀이는 잘못이 없고, 더 안전하게 놀 권리를 고민하는 것은 국가의 몫이다. 그래서 일기장을 펼쳐 내년에 할 일을 적었다. ‘내년에는 사람 많은 데서 놀아야지.’

az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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