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자 칼럼] 그럼 이제 어떡할까?

한겨레 2022. 11. 24.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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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당하지 않을 만큼, 살아남기 위해 비굴과 자기 비하와 겸손 등으로 무장해서 이 나이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제 질렸다. 더는 자기 비하로 나 자신에게 죄를 짓기 싫다.
그럼 이제 어떡할까?

이경자 | 소설가

처음에 이 글의 제목을 ‘어디에 줄 설까?’로 정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지웠다. 줄을 서다니! 국민의힘인가? 더불어민주당인가? 권력을 가진 곳인가? 돈을 가진 곳인가? 혹은 남자 줄, 여자 줄? 경상도 줄, 전라도 줄? 도회지 줄, 시골 줄? 이런 상상이 마구잡이로 들고일어나서다. 혹은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킬까 지레 걱정이 되고 겁이 나서다.

왜 ‘줄’이라면 무턱대고 우선 이렇게밖에 연상하지 못할까? 왜 이런 늙은이가 됐을까?

잠시 굳는다. 이건 아무래도 내 잘못은 아니지 싶다. 나도 자연에 존재하는 다른 생명들처럼 고유성과 일반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태어나서 내 성징을 확인한 어머니로부터 생애 최초 서열 교육을, 그러니까 차별 경험을 했고 그것은 내 인성에 스며들어 각인된 첫번째 교육이기도 했다.

자라나면서 차별의 다양한 교육이 이뤄졌고 그 차별에 적응하지 못하면 ‘인간이 못 될 것’이라고, 파문에 가까운 낙인이 내 존재에 찍혀야 했다.

그 이후, 자살당하지 않을 만큼, 살아남기 위해 비굴과 자기 비하와 겸손 등으로 무장해서 이 나이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제 질렸다. 더는 자기 비하로 나 자신에게 죄를 짓기 싫다.

그럼 이제 어떡할까?

어떤 자리에서 동업자를 만났다.

“지구가 망하겠죠?”

동업자가 말했다. 딱히 대답을 기다리는 건 아니었지만 나는 격하게 공감을 표시했다.

“지금 망하고 있잖아요. 가속이 붙었네요.”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었으나 분위기는 좀 침통하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서로 지구의 망해가는 모습, 그 원인, 원인 제공 주체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나는 자연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자연이 병들고 사람도 살아남을 수 없게 한 첫번째 원인이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라는 설에 있다고, 오래도록 몸에 밴, 주눅 든 약자의 특징 중 하나인 부자연스럽게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연을 인간의 욕구대로 개척하고, 그래서 필요한 만큼 쓰다가 버리는 건 그저 만행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계속되고 있다는 주장과 함께.

원래 놀부같이 욕심보를 타고 난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 탐욕은 사람을 흥분시키기도 한다. 탐욕이 실현됐을 때 엄청난 성취감이나 우월감에 중독되기 아주 쉽다. 이 중독이 국가 시책처럼 되던 때의 뉴스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소비가 미덕이다’라고 대통령이 그랬던가? 절약하는 것이 아름답다거나 존중받던 건, 다 자본주의의 무능력자들에게 해당하는 소리. 소비는 정치권력과 재벌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사회 이념이 됐다. 근검절약이 윤리 도덕의 기본이던 시대가 끝나던 즈음의 ‘부자 광풍’. 단군 이래의 가난을 벗어나게 됐다고. 그리고 상업주의의 꽃이라는 광고는 근검절약의 가치판단력을 의식에서 아예 지워버렸다.

이 구도가 물론 우리 시대에 처음 생기거나 완성돼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득한 과거, 인간의 역사 속에서 모든 관계가 ‘힘’에 의해 짜이기 시작한 뒤로 마침내 오늘에 이르는 동안 여러 가지로 설계되고 반복됐을 것이다.

어쨌든 그것이 무엇이건, 힘은 지배이고 지배는 복종을 포함하고 복종은 억압이 근원인 건 분명하다.

그럼 이제 어떡할까?

지금 지구는 망하지만 그 망함 속에서 싹트는 새로운 물결도 있다. 그건 힘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인데 차별 없는 세상, 누구나 존중될 균형에 대한 요구와 실천과 실현이다.

방탄소년단을 이야기하려 한다. 아미가 되는 것이 처음엔 좀 부끄러웠다. ‘불타오르네’, ‘낫 투데이’ 등등의 노래를 들었을 때,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솟구치는 ‘무엇’을 감지했다. 그 떨림을 잊지 못한다. 그들의 노래를 들으면 나이가 들어도 삭지 못한 억울함과 열패감과 부당함의 요소들이, 존재 어딘가에 깊이 박혀 있던 그것들이 고물고물 되살아나는 게 느껴지곤 했다. 그 느낌이 처음엔 무엇인지 몰랐지만 이제 안다. 희망이라는 것, 용기를 가져도 된다는 것, 우린 다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들 음악의 원천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잘못으로 불행해지고 슬퍼지고 차별받고 모욕받는 것들에 대한 연대감과 위로에 있다고 나름으로 해석했다.

왜 세계의 아미들이 ‘방탄은 우리의 희망’이라고 울면서 말하는지 공감됐다. 그들은 변방의 아이들이며 소년이며 청년이다. 그 변방에 대한 차별은 잘못된 것, 부당한 것은 바로잡혀야 하며 그 수직적인 우열의 잣대는 곧 폭력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로 위로이며 희망이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 그들 뒤로 나에게 또 하나의 희망, 기쁨이 왔다. 나로 말하자면 몸은 늙어도 더불어 늙지 못하는 분노와 슬픔이 남아 있는 할머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의 불균형에 시달린다. 그런 내게 ‘소녀들’이 나타났다.

소녀들. 여자다.

‘여자’라고 말하거나 ‘여자’라고 쓰면, 또는 생각하면 무턱대고 가슴에 깊은 서러움, 그러니까 연민이 번진다. 여자라는 말 속에는 순종과 부드러움과 수줍음이 특성처럼 들어 있다고 믿어야 했던 시대도 있었다. 그런데 소녀들, 아직 어린 소녀들이 여성의 아름다움을 여자 사람의 아름다움으로 바꿔놓는 중이다.

소녀들은 자신의 몸을 한껏 드러내고 돋보이게 한다. 자신의 몸을 돋보이게 하는 목적이 남성이나 타인에게 있지 않다. 자기 자신의 몸에 대한 당당함, 그 당당함이 아무렇지 않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옷을 입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맵시를 내고 행동하는 소녀들. 얼굴엔 분노도 타협도 수줍음도 없다. 존재가 자유다.

지금 우리는 다양한 문화의 충돌이, 그 자체로 변혁의 에너지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선승은 악마와 천사의 능력은 같은데 하는 일은 다르다고 책에 썼다. 그 다른 역할이 바로 천사는 모으고, 악마는 쪼개는 것이라고.

모으는 것은 상호 존중 없이는 불가능한 일. 다른 문화를 수평적으로 받아들이는 일. 그래야 깨뜨려 낱낱의 조각으로 만드는 악마의 편에 서지 않게 된다. 지구는 둥글다. 자연은 그 자체로 불평등이 불가능함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자연은 불의와 불평등과 타협하지 않고 억압에 굴종할 수 없다. 자연재해는 사람이 뿌린 것에 대한 반응이다. 반응은 너무도 정확해서 순수하다.

더 늦기 전에 희망의 행방을 놓치지 말았으면. 흐름이 잘리지 않았으면. 두려움을 가지고, 소리 내지 못한 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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