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cal Mania] 해방촌HBC

2022. 11. 24.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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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운 산비탈 ‘산전뷰해’가 되다

명동 신세계백화점에서 남산3호터널을 지나 첫 번째 정거장이 한신휴아파트이다. 맞은편은 경리단길이다. 정거장에서 조금 가면 미군부대 담장이 보이고 오른편으로 길이 있다. 담벼락에는 옹기와 벽화가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첫 장면부터 이질적인 것들의 공존, 기대감이 상승한다. 바로 ‘해방촌HBC’ 가는 길이다.

눈카페 루프탑
해방촌 가는 길, 해방촌오거리와 신흥시장 두텁배위로까지가 가장 선호하는 코스이다. 길은 경사가 조금씩 가팔라진다. 힐을 신고는 조금 불편하겠다 싶다. 마을버스가 스치듯 오가는 좁은 길 양편은 전형적인 주택가다. 3층에서 5층의 연립과 빌라가 줄지어 서있고 1, 2층은 거의 상점이다. 커피숍, 레스토랑, 편의점, 철물점, 세탁소, 외국식재료 전문점도 있다.

해방촌이 MZ세대의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루프톱 카페이다. 산비탈에 자리한 카페들이 옥상을 개방했고, 이 옥상에서 보는 뷰가 SNS를 통해 입소문을 탔다. 해방촌에는 유명한 포토존 골목과 카페가 있다. 해방촌 파운즈 앞 골목, 해방촌아름이 카페의 좁은 골목길 사이, 신흥시장 오리올 케이크, 눕카페, 해방촌전망대 등이다. 좁은 골목 뒤로 펼쳐지는 시원한 전경이 실제로도, 사진으로도 멋지다. 그런데 이 포토존마다 ‘제발 조용, 제발 금연’이라는 호소문이 붙어 있다. 이곳은 거주지이니 당연히 예의가 필요하겠다.

해방촌은 한국 현대사의 증인이다. 일제강점기 이곳은 산림지대였다. 유일한 건물은 일본인학교와 호국신사뿐이었다. 해방과 함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월남민, 귀국동포들은 살 곳을 찾아 산으로 올라왔다. 이들은 일명 하꼬방, 판잣집을 짓고 공동체를 형성했다. 1947년 교회, 1955년 성당을 건립하고 이 종교 시설은 주민들의 복지와 교육을 대신했다. 1955년 평안북도 선천 출신 실향민들이 보성여자중고등학교를 세웠다. 이 보성학교는 선천 보성여학교가 전신이다. 또 1954년에는 평양에 있던 숭실학교가 해방촌에 문을 열었다.

시멘트 포장지, 판자, 미군 레이션 박스를 사용한 집이 매일 뚝딱 지어졌다. 해방촌 사람들은 1950년대 담배를 제조해 남대문시장에서 팔았다. 사람들이 더 몰려들었다. 1960년대 스웨터 가내수공업, 일명 ‘요꼬 공장’들이 다닥다닥 들어서고 주민의 70%가 이 작업에 매달렸다. 당시 해방촌표 스웨터는 전국 물량의 약 30%를 차지할 정도로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중국산 물량이 수입되면서 해방촌이 쇠퇴하자 젊은이는 떠나기 시작했다. 몇 년이 지냈다. 그 사이 길 건너 경리단길은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그러다 경리단길에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며 해방촌은 기회를 맞았다. 공방, 카페들이 길 건너와 해방촌에 자리잡으면서 해방촌은 서서히 기지개를 폈다.

1954년 소설가 이범선은 소설 『오발탄』에서 해방촌을 이렇게 묘사했다. ‘산비탈을 도려내고 무질서하게 주워 붙인 판잣집들이었다. 철호는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레이션 곽을 뜯어 덮은 처마가 어깨를 스칠 만치 비좁은 골목이었다. 부엌에서도 아무 데나 마구 버린 뜨물이, 미끄러운 길에는 구공탄 재가 군데군데 헌데 더뎅이 모양 갈렸다’고. 그 무겁게 걸었던 해방촌 산비탈이 이제는 ‘뷰맛집’으로 태어났다. 단점을 장점으로 만든, 그래서 열린 공간을 제공한 해방촌 주민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해방교회에서 본 서울 전경
글과 사진 장진혁(프리랜서)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56호 (22.11.29)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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