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는 소크라테스처럼 [알고보자 월드컵]
11월 23일 일본과의 조별리그 첫 경기를 앞두고 독일 축구 대표팀 선수들은 단체사진을 촬영하며 입을 가렸습니다. 카타르 월드컵 대회 개막 전후를 둘러싸고 계속 이어지고 있는 ‘무지개 완장’ 관련 논란에 의견을 표명한 것입니다. 독일 언론매체들은 이 동작이 국제축구연맹(피파)이 금지시킨 ‘원 러브’ 완장 금지에 항의하는 표시로 보인다고 보도했습니다. ‘원 러브’ 완장은 성소수자와 연대하고 차별에 반대하는 의미로, 잉글랜드·독일·덴마크 등 유럽 국가대표팀 주장들은 이 완장을 차고 경기를 뛰려 했지만, 피파가 옐로카드를 주며 제재하겠다는 입장에 완장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이 대회 개최를 위해 막대한 ‘오일 달러’를 뿌린 카타르는 성소수자 등을 처벌하는 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축구는 그깟 공놀이가 아니라, 경제이며 정치입니다. <한겨레21>은 ‘축구 이상의 무엇’을 꿈꾸었던 이들을 소개한 제1072호 ‘축구공은 굴러 어디로 가는가’ 글을 다시 소개합니다. 편집자주
초록빛 그라운드에 굴러가는 것이 축구공인지 돈인지 모르게 되어버린 2011년 겨울, 브라질 축구 영웅 소크라테스는 세상을 떠났다. 이름에 걸맞게 그는 죽으면서 수많은 명언을 남겼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다면, 그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알던 축구선수 소크라테스는 “나는 마신다. 나는 피운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답했다.
“악법과 싸워야 한다”던 다른 소크라테스
그는 삶의 모순을 온몸으로 보여준 사나이다. 의사였으나 알코올과 니코틴을 평생의 벗으로 삼았고, 머리를 쓰는 정치철학자이기를 원했으나 몸을 본능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축구선수가 되었다. 결국 그는 선수 생활을 끝내고 기어코 철학박사 학위를 받아냄으로써 얼핏 모순처럼 보이는 것들은 기실 ‘사물의 순서’에 불과함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가 떠나던 날, 사람들은 그의 축구를 기억하면서도 그의 입에서 쏟아져나온 수많은 명언을 기억해냈다. 그중 최고로 꼽히는 것은 당연히 정치와 축구를 절묘하게 묶어낸 말이었다. “더 좋아진 나라에 내 골을 바치리라”(Give my goals to a better country).
그에게 더 좋은 나라란 무엇이었을까. 적어도 독재의 마수에서 벗어난 민주화된 나라였다. 소크라테스가 10살 되던 해인 1964년부터 시작된 군사독재는 그의 청년기를 지배했다. 그의 말대로 “독재체제의 아이”였다. 음습한 권력의 그림자는 세상의 곳곳을 파고들었고, 브라질의 일상이자 ‘종교’인 축구도 예외일 수 없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고 했다면, 축구선수 소크라테스는 “악법과는 싸워야 한다”고 답했다.
소크라테스가 뛰었던 소속팀 코린티안스는 1910년대에 노동자들이 만든 팀이었다. 그는 거기서 조직적인 민주화운동을 했다. 구단의 고답적인 운영을 거부하고, 부당하고 고압적인 대우를 거부했다. 선수들이 축구팀 운영을 맡고, 모든 것을 선수들이 다수결로 정했다. 심지어 점심 메뉴를 정하는 것도 다수결로 정했다. 동시에 축구 성적은 더 좋아질 것이라고 공언했다. 축구하기에도 바쁜 선수들이 이런 ‘번잡한’ 일을 한 이유는 명백했다. 구단주의 ‘독재’를 없애고 민주주의적 다수결로 운영하면 축구를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려 했다. 민주주의가 우월한 가치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효율적임을 보이려 했다. 한마디로 민주주의를 증명하고자 한 것이다. 이름하여 ‘코린티안스 민주주의’ 운동이다. 서슬 퍼런 총구에 맞서 그들이 나섰다.
1970년대 브라질 군부독재는 국민의 정치적 좌절을 해소하는 방책으로 축구를 장려했고, 그 정점에는 펠레의 ‘영웅화’가 있었다. 하지만 코린티안스는 바로 그 중심에서 ‘전복’하려고 했다. 보통은 스폰서의 광고가 들어가는 유니폼의 뒤쪽에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선명하게 적어넣었다. 민주주의를 잊게 하려는 축구에서 민주주의를 살리려고 했다. 오랜 독재에 지쳐가며 주저앉아 있던 브라질 국민들은 서서히 자기 다리에 힘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코린티안스 선수들처럼 다시 뛸 수 있을 것 같았다.
1982년 11월은 절정이었다. 선수들은 “11월15일에는 투표하자”는 글귀를 달고 달렸다. 그들은 여전히 공을 다투며 달리고 있었지만, 브라질 국민이 거기서 본 것은 온몸으로 휘둘러대는 ‘민주주의 깃발’이었다. 이 선거에서 민주주의의 물꼬는 터지고 몇 년 뒤 군부독재는 종식됐다. 눈물로 달렸던 1982년 그해, 코린티안스는 상파울루주의 챔피언으로 등극했다. 민주주의는 과연 효율적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경구 “더 좋아진 나라에 내 골을 바치리라”가 실현되는 순간이었으니, 소크라테스는 당연 이때를 “내 생애 가장 완벽한 순간”으로 꼽았다. 민주주의라는 결승골.
소크라테스의 코린티안스 이전에는 바르셀로나가 있었다. 20세기의 시작을 몇 달 앞두고 만들어졌으니, 한 세기를 훌쩍 뛰어넘는 역사를 가진 팀이다. 수십만 명의 지지자가 소유하고 운영진을 선출하는 클럽이자, 카탈루냐의 독립정신을 이어받으며 ‘바르샤’라는 애칭까지 얻었다. 축구공만을 바라보지 않는 팀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모토는 “클럽 이상의 무엇”(Mes que un club)이다.
‘클럽 이상의 무엇’이었던 바르샤
바르샤 저항의 역사도 깊다. 1925년 수천 명의 바르샤 지지자들은 당시 독재자 리베라를 규탄하며 자발적 시위를 벌였다. 결과는 혹독했다. 6개월 동안 축구장은 폐쇄됐고, 구단주도 쫓겨났다. 스페인 내전이 시작된 1936년, 군부에 저항해 싸운 선수들이 다수 포함됐던 바르샤에 총구가 겨누어졌다. 당시 카탈루냐 독립운동의 핵심이던 구단주는 군인들에게 암살당한다. 그 뒤 무차별한 체포와 압제가 따랐다.
긴 시련의 역사였지만, 바르셀로나 시민들은 “클럽 이상의 무엇”이었던 바르샤를 꿋꿋이 지켜냈다. 축구 경기가 끝날 때마다 바르샤 지지자들은 크고 작은 저항을 자발적으로 조직했다. 노동자 파업이 있는 날이면, 축구장에서 집까지 먼 길을 걸어가며 노동자를 성원했다. 바르샤는 더 이상 축구팀이 아니라 스페인 민주주의와 자유의 상징이었다. 그러다보니 ‘별난’ 선수들도 있었다.
1970년대 초에 유명세를 날리던 네덜란드 선수인 요한 크라위프는 ‘잘나가던’ 마드리드를 버리고 바르샤를 택했다. 그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그가 말했다. “나는 독재를 지지하는 마드리드를 위해 뛸 수는 없다.” 그는 아들의 이름도 카탈루냐 성자의 이름을 따라 지었다. 프랑코의 독재가 1974년에 종식되니, 참으로 긴 저항의 시간이었다. 긴 독재가 끝난 뒤에야 바르샤의 이름과 클럽 문장이 복원됐다.
바르샤는 오랫동안 상업주의와도 싸워왔다. 다른 명문 구단들이 광고 스폰서를 받고 축구선수의 가슴에 광고주의 이름을 달도록 할 때, 그들은 유니세프를 택했다. 매년 200만유로에 달하는 돈을 유니세프에 기부해왔다. 세계 지도자들이 근엄한 표정으로 모여서 국민총소득의 0.7% 이상을 해외 원조에 사용하겠다고 선언한 뒤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딴청을 피울 때, 바르샤는 그 약속을 지켰다. 1920년대 독재자 리베라와 싸웠던 바르샤 구단주는 평생 돈 문제로 고민하다 결국 우울증으로 자살했다. 정치권력과 돈과 싸워온 역사를 그렇게 지키려 했다. 이를 ‘바르샤 정신’이라 불렀다.
축구 부패 상징 ‘카타르’의 돈에 진 걸까?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변했다. 소크라테스가 브라질의 눈물 속에서 떠나던 해에 바르샤는 “돈이 곧 실력”이라 믿는 구단주를 새로이 선출했다. 이듬해에는 카타르와 천문학적 금액의 스폰서 계약을 맺게 된다. 바르샤 선수들은 이제 가슴에 카타르항공이라 선명하게 찍힌 유니폼을 입고 뛴다. 축구공이 한 바퀴 굴러갈 때마다, 선수들의 땀내 나는 숨소리가 터질 때마다, 한쪽에선 컴퓨터가 부지런히 돈 계산을 해댔다. 지지자들도 축구장을 빠져나가면서 선수들의 ‘거래 가격’을 얘기했다.
카타르는 오늘날 축구 부패의 상징이다. 축구공도 녹여내는 ‘불타는 땅’인 카타르로 2022년 월드컵 개최권이 넘어갔을 때, 굳이 관계자가 아니라고 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 가능했다. 지금은 스위스와 미국에서 뇌물 관련 조사로 시끌벅적하다. 하지만 돈 문제만은 아니다.
카타르에서는 월드컵 준비 작업이 한창이다. 뙤약볕에서 축구 경기를 하는 것은 고된 일이겠지만, 이런 고된 축구 경기를 위해 경기장을 건설하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다. 그리고 목숨 건 작업을 하는 이들은 모두 이주노동자다. 이들은 무더위에 안전장치 없는 현장에 노출돼 있고, 숙소 역시 열악해 휴식은커녕 건강을 악화시키는 죽음의 공간이 되었다. 파키스탄이나 인도와 같은 더운 지역 출신인 이들도 속수무책이다. 매년 1천 명 이상 목숨을 잃는다. 국제기구나 시민단체에서 항의하지만, 저쪽은 개의치 않는다. 돈 벌려고 일하러 와서 생긴 일인데 어찌하겠느냐는 식이다. 원래 지병이 있던 노동자들이 죽는다는 ‘해명’까지 동원했다. ‘카팔라’(Kafala)라는 악명 높은 이주노동자 고용제도 때문에 노동자는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한다. 억울하고 위험해도 하소연할 방법이 없다.
수천 명의 목숨으로 지어진 축구장에서 어찌 축구공을 굴릴 것인가. 바르샤의 지지자들이 나섰다. 서명운동을 통해 카타르항공과의 스폰서 계약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바르샤는 ‘클럽 이상의 무엇’이다. 리오넬 메시 같은 선수들이 전부가 아니다. 공정과 사회정의도 중요한 부분이다. 따라서 노동자의 노동조건이 개선되기 전까지는 카타르항공과 모든 관계를 끊어야 한다.” 6만 명 이상이 서명했다. 마침 구단의 회장 선거도 있었다. 1980년대 영광의 바르샤를 이끌었던 라포르타가 후보로 나섰다. 바르샤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다. 카타르의 돈을 과감하게 포기하자고 했다. 유니폼에서 광고를 빼고, 유니세프를 다시 지원하자고 했다. 선거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올봄 여론조사 결과도 고무적이었다.
지난 7월18일(현지시각) 투표가 있었다. 결과는 현직 회장의 재선이었다. ‘바르샤 정신’은 패배했고, 카타르의 물량 지원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이미 익숙해져버린 큰돈을 포기하기도 어려웠겠지만, 올해 바르샤가 달성한 경이로운 성적의 영향이 컸다. 바르샤는 국내 리그, 국내 컵, 그리고 유럽 챔피언스리그 타이틀을 몽땅 석권하는 삼관왕을 달성했다. 이를 두고 언론에서는 ‘실용주의가 낭만주의를 이겼다’고 평했다. 세상은 변했고, 한때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던 바르샤 정신은 이제 철부지 낭만주의로 전락했다.
밤늦게까지 초조하게 기다리며 “더 나은 팀에 내 골을 바치리라”를 은근 기대했던 나는 선거 결과를 듣고 소크라테스를 떠올렸다. 그는 한때 피델 카스트로를 너무나 존경해 자신의 아들에게 ‘피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의 어머니가 아이한테 그런 이름은 이상하지 않느냐며 나무랐다. 그의 답은 간단했다. “어머니… 그럼, 어머니는 도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요?” 우린 도대체 축구에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소크라테스, 그의 꿈은 이루어졌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소원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팀 코린티안스가 브라질 리그에서 우승하는 어느 일요일에 죽고 싶다고 했다. 그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경기 직전 그의 부고를 알게 된 코린티안스 선수들은 그를 가슴에 묻고 뛰어 승리를 이루었다. 그가 그랬다. “축구선수는 축구를 결코 버린 적이 없다. 선수를 버리는 것은 바로 축구다.” 이 글을 쓰는 일요일 오후에 그를 생각한다. 축구공은 굴러 굴러 어디로 가는 걸까.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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