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다, 네팔!] 히말라야가 자원인 네팔, 무분별한 난개발에 시름

조진수(네팔·히말라야 전문 사진가) 2022. 11. 24.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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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탕의 여름 (하)
초세르곰파 전경, 법당을 크게 새로 짓고 있다.

히말라야를 동경하는 이들에게 지난 3년은 갈증의 시간이었다. 인간의 어리석음이 부른 역병 때문에 하늘과 땅과 바다의 길이 막혔다. 조진수씨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네팔·히말라야 전문 사진가다. 그가 이번에 3년 만에 그리운 히말라야 땅을 밟았다. 그는 주로 겨울에 히말라야에 갔지만 이번에는 여름의 모습을 담았다. 조진수 작가의 네팔 여행기를 두 차례에 나눠 싣는다.

8월 7일 야르똥 축제

야르똥 축제를 구경하러 로기어곰파(3,950m)로 향한다. 야르똥은 현지어로 여름의 끝이므로 여름축제로 이해하면 된다. 초세르, 로만탕, 차량, 무티나트 일대에서 3일 동안 지속된다. 춤과 노래, 경마가 주된 프로그램으로 일정이 빠듯한 탓에 로기어곰파에서 열리는 프로그램만 관람했다.

로기어곰파는 티베트 불교의 창시자인 린포체 파드마삼바바가 8세기에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무스탕에서 유일한 닝마파 곰파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한다. 나머지 곰파는 모두 샤카파 곰파라고 한다.

닥마르마을을 지나는데 현지인들이 모여 축제 준비에 바쁘다. 사람들은 화려한 전통 옷을 입고, 수십 필이나 되는 말의 안장과 마구를 예쁘게 치장한다. 말은 작고 튼튼한 몽골말로 축제 분위기를 느끼고 들떠 있다.

야르똥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로기어곰파로 말을 타고 올라오는 차량마을 사람들.

고갯마루에 올라가보니 훌륭한 뷰포인트다.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이 감싼 아늑한 지형 안에 메밀꽃과 감자꽃이 흐드러진 소박한 마을이 자리했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로기어곰파에 도착했다. 복숭아와 체리를 파는 상인들, 예쁘게 전통 옷을 차려입고 그룹을 지어 마니차를 돌리며 기도하는 여인들, 바쁘게 오가는 차와 오토바이가 축제 분위기를 돋우고 있다.

로기어곰파에 참석한 주변 마을 여인들이 전통복장으로 곱게 치장하고 기도를 하며 마니차를 돌리고 있다.

법당 안에는 학생 라마승들이 북과 심벌 등을 간간이 연주하며 불경을 외우고 있다. 구루린포체가 정면에 있고, 석가모니 부처님은 옆에 자리했다. 이 지역은 구루린포체에 대한 신앙이 깊다. 그만큼 영험하다고 간주한다.

닥마르, 차량, 마량마을 사람들이 말을 타고 연이어 온다. 80필에 가까운 말떼가 곰파 입구에 모여 들어가는 모습이 장관이다. 마을마다 조금씩 스타일이 틀리다. 차가 못 다니던 시절에는 말의 수가 더 많았을 것이다.

라마들이 법당 밖으로 나와 불경을 외우고 연주를 한다. 향을 많이 피워서 연기가 시야를 가릴 정도다. 주최 측에서는 생보리를 나누어 주며 하늘에 던지라고 권한다. 나쁜 기운은 나가고 좋은 기운이 들어오는 행위라고 한다.

보리는 현지의 주요 밭작물이며, 우리네 쌀처럼 귀한 곡물이다. 나중에는 보릿가루를 뿌려 사람들의 옷이 하얗게 변했다. 버터기름으로 밝히는 불도 회향의 방편인데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불을 많이 밝혀 놓았다.

마지막으로 광장에서 남녀노소가 어울린다. 원을 그리며 시계방향으로 돌고, 노래에 맞춰 춤을 추되 손을 잡지는 않는다. 야르똥 축제는 음식을 나누고 교류하는 장이지만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난다. 시쳇말로 기승전불이다. 현지인들과 티베트불교는 오랜 세월 밀착해서 떼어낼 도리가 없다.

야르똥 축제에 참석한 차량마을 곰파의 어린 라마학생들.

8월 8일 잔칫날에 우는 신부

로만탕(3,810m)을 떠나 초세르곰파로 향했다. 길은 평탄하고 다니는 차도 없어 한가하다. 로만탕의 여름은 생기가 넘친다. 대규모의 유채꽃과 메밀꽃이 눈을 시원하게 하고 이름 모를 들꽃들은 앙증맞다.

초세르곰파에 도착하자 라마승이 마중을 나온다. 몇 년 전부터 곰파를 통해서 지진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을 한국의 스님과 함께 돕고 있다. 아이들은 54명이고, 포카라에서 공부 중인데 우수한 학생은 인도유학까지 보낸단다.

차와 짜파티를 대접받고 학용품을 사라고 지원금을 조금 드렸더니 라마승이 앞쪽에 있는 뷰포인트로 몸소 안내를 한다. 정상에 올라가니 무너진 옛 절터다. 그곳에서 초세르 일대와 멀리 히말까지 촬영할 수 있었다.

초세르마을을 지나는데 결혼식이 있어 찾아가 보았다. 이 지역은 결혼 후 10년간 신랑이 처갓집의 일을 돌봐주는 풍습이 있단다. 그 후에 또 결혼식을 올리고 정식으로 신부를 데려간다. 두 번 결혼식을 올리는 셈이다.

신랑은 10년 동안의 시험을 통해서 좋은 신랑임이 검증되었다. 그래서 처갓집에서는 신부에게 혼수와 재산을 나누어주고, 시댁에 완전히 보내는 경사스러운 날을 맞은 것이다. 오늘의 신부는 32세로 아이까지 있다.

신부 집의 개인 법당에 허락을 구하고 들어가 보았다. 곱게 치장을 한 신부 옆에서 라마가 불경을 읽어 주고, 좌우에는 친인척들이 전통복장을 입고 앉아 있다. 보지는 못했지만 공무원에 의한 결혼인증 과정도 있는 것 같다.

로기어곰파를 방문한 주민들이 조그만 그릇에 야크버터불을 피워 놓고 기원을 한다.

신부가 법당을 나설 때부터가 이색적이다. 좋은 기운을 상징하는 생보리를 뿌리는 건 이해가 간다. 그런데 그때부터 신부는 우는 소리를 내고, 옆에서는 구슬픈 노래를 부른다. 뜻을 모르는 나도 저절로 눈물이 핑 돈다.

옆에서 조금씩 술을 권하면 신부는 받아 마시고 계속 우는 소리를 낸다. 구슬픈 노래도 끊이질 않는다. 친인척도 울고, 하객들도 울고, 나중에는 신부의 아이까지 운다. 그렇게 천천히 이동하면서 마당까지 나온다.

신부는 마당에서 대기하던 차를 타고 시댁으로 향한다. 친인척은 다른 차에 타고 그 뒤를 따르고, 우리도 그 뒤를 따라갔다. 시댁은 친정에서 500m가량 떨어져 있는데 새로 지은 큰 건물로 미루어볼 때 부잣집이다.

시댁의 마당에 도착한 신부는 차에서 내려 우는 소리를 내고, 옆에서는 구슬픈 노래를 한다. 신부는 술을 조금씩 받아 마시면서 시댁의 법당으로 이동한다. 경사스러운 잔칫날에 왜 우는가. 부모의 은혜에 보답을 못 하고 시집을 가기 때문이란다. 그렇다. 부모의 은혜는 원한다고 해서 아무 때나 갚을 수 없다. 부모는 마냥 기다려주지 않는다. 살아 계실 때 효도해야 한다.

초세르마을 결혼식장의 신부(오른쪽).

8월 9일 난개발에 대한 우려

오늘부터 하산하는데 지난밤에 내린 비로 먼지 걱정을 덜었다. 로만탕의 먼지는 차원이 다르다. 차를 달리면 푸석푸석한 먼지가 천지에 비산한다. 코가 막히고 목이 잠기는 그 먼지의 고통은 겪어본 사람이 아니면 모른다.

발걸음 가볍게 며칠 전 만났던 한국인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갔다. 안타깝게도 고소증세로 꼼짝을 못 하고 누워 있다. 이곳은 해발 3,800m에 불과하다. 아마도 나무가 없어 산소공급이 안 되어 고소증세가 심한 것 같다.

수확이 많았던 로만탕을 뒤로하고 차량마을로 내려갔다. 도로 정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 운행에 애를 먹었다. 가미마을에 들렀더니 따라부자에 참가했던 그 많던 사람들이 어느 새 사라지고 한적하다.

이 지역은 비포장 산길이지만 넓게 뚫려 있다. 하지만 교통안전을 위한 안내 표지판이나 가드레일은 전무한 실정이다. 그런데도 큰 트럭들이 경쟁적으로 추월하며 과속으로 달려서 내리막길에서의 사고가 우려된다.

도로도 그렇지만 난개발도 문제다. 집을 어수선한 위치에 짓고, 전봇대는 무질서하다. 통신 중계소, 숙박업체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질서 있고, 정돈된 상태가 아니라 마구잡이로 개발한다는 인상을 준다.

네팔 산간마을의 흙집과 돌집도 양철지붕이나 시멘트 건물로 대체되고 있어 대책이 시급하다. 현지인의 흙집은 기본적으로 자연환경의 조건, 기후에 대한 대응, 실용성, 사회 문화적인 생활양식 등을 고려한 결과물이다.

네팔의 유망한 자원은 히말라야이며, 이 집들은 히말라야와의 조화에 성공했다. 네팔이 관광산업이라는 원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다면 오랜 세월 히말라야와 조화를 이뤄온 전통가옥을 무가치하게 도태시켜서는 안 된다. 보존과 공존의 방안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고 본다.

추상곰파로 향했다. 넓은 계곡을 건너야 하는데 차가 다닐 수 있는 다리는 현재 건설 중이라 도보로 간다. 사과밭을 지나자 긴 구름다리가 나온다. 그 다리를 건너자 오른쪽 오르막에 마니스톤(불경을 새긴 돌)이 길게 쌓여 있다.

추상곰파에 도착하자 나이 든 여성 관리인이 반갑게 맞이한다. 문을 열어주어서 곰파 안으로 들어가 보니 전체적으로 관리가 안 되어 있다. 불상과 조사상은 먼지를 두텁게 뒤집어쓰고, 그 옆에는 불경이 어지러이 쌓여 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추상곰파의 역사, 문화, 종교적인 가치는 매우 크다. 하지만 관리 부실로 불상은 빛을 잃어버리고, 불경과 탕카는 훼손되어 가고 있다. 히말라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문화재를 세심하게 관리하는 차원으로 개발해 히말라야가 빛나는 모습으로 세상과 만나게 해야 한다.

초세르마을 입구에 새로 지은 신랑집 법당 안에 참석한 친인척과 하객들.

8월 10일 산사태에 긴장하며 길을 가다

가사에서 묵었는데 로지에서 감자를 판다. 감자는 서늘한 기후에 물 빠짐이 잘 되고 햇빛이 좋은 토양에서 잘 자라는 작물로 이 지역의 특성과 부합한다. 여기 감자는 겉은 붉고 속은 노랗다. 상당히 맛이 좋아서 조금 샀다.

오늘은 포카라로 돌아가는데 밤새 비가 내려서 걱정스럽다. 며칠 전 올라올 때 산사태가 발생했던 지역을 지나야 하는데, 아직 복구가 안 되어 있거나 산사태가 더욱 심해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네팔의 산간 도로는 절벽을 횡으로 절개해서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 절벽은 푸석푸석한 퇴적암이라 낙석이 쉽게 발생한다. 특히 우기(6~9월)에는 낙석에 더해 산사태까지 발생하기 쉬운 악조건을 갖고 있다.

장비, 인력, 재정 역시 부족하다. 산사태에 대한 복구가 늦을 수밖에 없다. 워낙 넓은 지역에서 다발적으로 발생하기에 감당하기가 어려운 측면도 있다. 산사태는 매년 반복되어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실정이다.

이런 사정이 있어 걱정을 했는데 산사태 현장에서 페이로다가 작업을 마치고 빠져나온다. 완전히 정리한 것은 아니지만 차량통행을 막지는 않아 다행이다. 언제 바위들이 굴러 떨어질지 몰라 초긴장을 하면서 통과했다.

노련한 운전기사는 1단 기어로 가다 깊은 진흙탕이 나타나면 재빨리 4륜구동으로 변환해서 운행한다. 한동안 그렇게 덜컹거렸더니 이번에는 차 지붕의 짐을 묶었던 밧줄이 풀려서 고쳐 매야 했다. 가사마을부터 레데마을에 이르는 구간이 산사태에 가장 취약하다고 파악된다.

신랑집에 도착해 집으로 들어가는 신부. 앞에 있는 여인들의 구슬픈 노래소리에 계속 울고 있다.

큰 리조트의 완성을 앞두고 있는 따토파니를 지나 베니까지는 진행이 무난하고, 베니부터 바그룽 입구까지는 다시 진흙길이어서 어렵게 빠져나왔다. 그후부터는 길도 넓고 포장이 잘되어 있어 속도를 높였다.

이따금 도로 위에 한가롭게 앉아 있는 개나 소 등의 가축들을 발견한다. 가축들은 차가 달려가도 놀라지 않고 피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이 지역 동물들은 아직 차량의 스피드에 적응을 못 하고 있어 로드킬이 우려된다.

오후 2시 반경 포카라에 도착했다. 쌀쌀한 산간 지역과 달리 더위가 느껴진다. 살짝 어지러운 증세가 있는데, 벰바에 의하면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급하게 고도를 낮춰서 생긴 저산증이라고 한다. 고산증과 반대다.

산간 지역의 도로 사정이 좋아져 차량을 이용한 트레킹이 늘고 있다. 현대인들은 늘 시간과 돈에 쫓긴다. 도보나 당나귀를 이용한 트레킹은 시간과 돈은 물론이고, 강한 체력까지 갖춰야 한다. 반면에 차량을 이용하면 목적지의 단기 트레킹이 가능해진다. 각자의 사정에 따라 선택하면 될 일이다.

8월 11~13일 10일간의 무스탕 트레킹을 마치며

한적한 산에 머물다가 카트만두로 복귀하면 도시 특유의 소음과 분주함이 낯설게 다가온다. 그런데 이번에는 색다른 분위기가 감지된다. 이방인들에게 인기 높은 네와르족의 '가이 자트라(암소 축제)'가 시작됐다고 한다.

네와르족은 네팔 인구의 5.4%에 불과한 소수민족이지만 카트만두 인구의 44%를 차지한다. 예술, 건축의 솜씨가 뛰어나 왕궁, 사원, 불탑 등을 건설했으며, 경제적으로 영향력이 매우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가이 자트라는 네팔력으로 군라달 초부터 8일간 이어지는데 해마다 날짜가 달라진다. 카트만두를 통치했던 프라 타프 말라 왕이 아들의 죽음 이후 슬픔에 빠진 왕비를 치유할 목적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망자를 추모하고 공양하는 축제라고 하면 이해하기 쉽다. 프로그램은 춤, 노래, 웃음을 담고 있으며, 각종 분장을 한 사람들의 퍼레이드가 압권이라는데 목격하지는 못했다.

소규모 행렬은 다수 참관했는데 망자의 사진을 든 사람이 앞장서고, 그 뒤에 소를 상징하는 관을 쓴 아이들이 따른다. 이 두 가지가 행렬의 기본이고, 가족 수와 재력, 취향에 따라서 행렬의 규모는 달라진다.

망자의 사진을 꽃으로 장식한 사람, 머리에 띠를 두르고 소뿔 모양으로 두 개의 나뭇가지를 꽂고 있는 아이들도 있다. 때로는 트럼펫, 클라리넷, 북 등을 연주하는 대규모 악단이 뒤따르기도 한다.

초세르마을 유채밭에서 만난 여인(밝은 미소가 행복해 보인다).

그렇다면 소는 왜 등장할까. 힌두이즘에 따르면 망자의 혼은 소의 꼬리를 잡고 저 세상의 입구로 갈 수 있다고 한다. 오직 소만이 갖고 있는 특별하고 성스러운 능력이다. 힌두교에서 소를 홀대 못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전에는 살아 있는 소를 이끌고 거리를 행진했다고 한다. 소를 사용할 수 없을 경우에는 가족 중 어린이가 소로 분장해서 참가했다고 한다. 하지만 카트만두의 도시화가 심해지면서 더 이상 살아 있는 소의 행진은 어렵게 되었고, 소는 상징으로만 존재하는 축제로 자리 잡았다.

크게 보면 가이 자트라는 우리의 제사와 맥이 닿는다. 우리는 가족, 가문 단위로 내향적이고 정적인 추모 행사를 갖지만, 가이 자트라는 사회가 함께하는 외향적이고 동적인 축제 형식을 취한 점이 다를 뿐이다.

이렇게 10여 일간의 무스탕 여름 트레킹은 막을 내렸다. 우기에는 돌발변수가 있으므로 현지 가이드와 동행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따라부자, 야르똥 축제에서 현지인들의 신심을 확인했고, 가이 자트라에서 슬픔을 축제로 승화하는 시간도 함께했다. 히말과 스태프들에게 경외와 감사를 전한다.

월간산 1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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