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신문을 만든 그날의 기록

김진형 2022. 11. 2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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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일기장에서 찾은 본지 창간 비화
창간 주역 이원상 전 전무 공개
노화남 전 논설위원 회고 대담
일기장에 창간 당시 기록 생생
신문 발간 고뇌·희망·자긍 담겨
“자식같던 신문 뻗어나가 기뻐”

“지금 시간은 새벽 1시 30분이다. 기분이 좋아서 사장님, 안 국장, 노 위원님이 신문사 주변 선술집 문을 두드리고 사정사정해서 소주 두 병 마시고 들어왔다. 나는 매번 눈물이난다. 그러나 오늘, 아니 어제 저녁 부터는 감격과 기쁨의 눈물이다. 드디어 신문발행이 11월 26일자로 결정됐다.(11월 25일)”


#1992년 11월 26일, 강원도민일보의 시작이었다. 11월 24일 공보처로부터 창간을 해도 된다는 공문이 내려오자 신문사는 숨가쁘게 돌아갔다. 미리 준비했던 창간호 발간을 서둘러 진행했다. 창간 초기의 강원도민일보는 그들에게 단순한 ‘직장’을 넘어 넘어 혈육같은 존재였다. 이원상 전 강원도민일보 전무는 창간 초기 강원도민일보 상무를 맡아 회사 안팎의 살림을 챙기며 그때 있었던 모든 일들을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에 세심하게 기록했다. 강원도민일보 창간 주역 이원상 전 전무와 노화남 전 논설위원을 만나 일기장을 함께 넘기며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신문사 분위기가 현장감있게 읽힌다.

▲ 이원상(왼쪽) 전 강원도민일보 전무와 노화남 전 논설위원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창간을 알리는) 소식지에 적막하던 편집국도 한사람씩 늦은 출근으로 북적대기 시작한다. 무모한 추진이다. 젊은 기자, 어린 여기자, 여사원들이 안타까울 정도로 열심히 일하는 모습. 정말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오늘도 철야다. 우수한 두뇌를 가진 젊은 기자들이 자진해서 청소한다. 언제 나올지 모를 신문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원들, 매일 밤 12시까지, 심지어 새벽 4시까지 철야를 하는 것들, 모두 나를 울리는 일들이다. ‘하면 된다’는 우매한 이론이 적용되는 감동적인 현장이다. 생기 넘치는 사원들 표정. 모든 고난이 풀리는 순간이다. 다시 더 큰 난관이 올 것이다. 이것도 이겨낼 것이다.(11월 25일)”


#창간호 발간 후에도 힘든 일들이 이어졌다. 신문 오배송 사고도 많았다. 하지만 직원들은 경험을 통해 역량을 쌓아갔다. 일부에서는 직원 월급이 밀렸다는 소문도 돌았으나 사실이 아니었다. 강원도민일보는 어음을 발행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창간일 다음 날의 기록은 이렇다.


“오후 6시 20분, 마감시간이 넘었다. 편집국 기자들 숨소리도 안나게 작고에 여념없다. 각 부장들 열나게 뛰고 편집부장 진땀나고, 전배부장은 빨리 마감하라고 압력 넣고, 전산부는 연습 때보다 더 열심이고, 교열부 아가씨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제작국장은 윤전부는 완벽하게 대기중인데 기사 언제 들어냐고 압력넣고, 사회부장은 사건 체육 완벽하게 잘 한다고 신났고, 방문객이 너무 많아서 정신없다. 화분, 난, 꽃바구니가 그렇게 많은지.(11월 26일)”


#신문은 단 한번 지면을 내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장기적 관점을 가져야 한다. 남춘천역 인근에 있던 사무실은 열악했다. 하지만 사원들은 일치단결한 사명감으로 일에 임했다. 노화남 전 논설위원은 당시 예술계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문인들을 필진으로 섭외했다. 강릉 출신 이순원 소설가는 창간호 연재소설을 맡았고, 인제 출신 한수산 소설가를 초빙해 논설을 실었다. 고 이외수 작가 콩트도 연재됐다. 노 전 논설위원은 “이외수 작가가 아직 글을 못썼다고 하니 ‘여기서 나오지 말고 쓰라’며 방에 가두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저녁이면 목이 콱 막히고 전화는 계속 울리고, 직원들은 지치고 병나서 허약해지고, 결근하고, 자금은 무리하게 지출되고 자본 납입은 뜻대로 안되고, 예금 잔고는 자꾸 줄어들고 쓸 돈도 많았다. 그러나 사원들의 빛나는 눈동자와 정신없이 돌아가는 생생한 움직임들이 있었다. 편집계획은 착착 진행되고 여론은 호전되고 일은 조금씩 알게되고 이미 설치된 윤전기 성능도 제자리 찾아가고…. 사원들 사기 높아지면서 운영체계가 잡혀가고 있다. (10∼11월)”


“아직 안정되려면 멀었다. 너무 피로하다. 운전기사 과로도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 아침에 출근하니 난리가 났다. 24, 25일자 사설이 중복됐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전산출력의 착오였다. 참 신문 어렵다. 12월 25일은 휴일이지만 우리는 그런 분위기도 없다. 집에는 마누라가 있다.(12월 25일)”


“내가 택한 길이지만 늦게 걸어본 모험은 역시 힘들고 험난하다. 처음 받아보는 운명. 자금 조달문제는 매우 어렵다. 허나 지금보다 내년 1년이 제일 고비일 것 같다. 어떻게 견뎌 나가야할지 벌써 근심이다. 허나 내 특유의 돌파력이 있지 않은가. 견디고 뚫고 부딪치는 저력. 그것 말고 내 매력이 없다.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한없이 뚫고 나가자. 손 국장이 지금 막 도착했다. 이렇게 모두가 뛴다. 잘 될 것이다.(12월 30일)”


#‘도민을 사랑하는 신문 도민이 사랑하는 신문’. 강원도민일보의 사시다. ‘정론 직필’을 대원칙으로 일을 시작했다. 신문사 1곳이 독점하기 보다 도민들의 다양한 의견들을 수용하는 것이 좋다는 여론도 한 몫 했다. 이원상 전 전무는 “자식같았던 강원도민일보가 30주년까지 이렇게 건강하고 든든하게 뻗어나가 기쁘다”며 “어려움도 있겠지만 사람을 잘 대하고 교육하면 극복할것”이라고 말했다. 일기 속 다음 문장이 모든 언론인에게 울림을 남긴다.


“신생 신문은 정도로 나가야 한다. 기사를 터뜨리는 것과 광고는 별개의 문제다. 광고 때문에 협상은 안된다. 도민일보에 걸리면 봐주는 것 없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장기적으로 인정받는 신문이 된다. 선명성을 심어주는 독자를 위한 신문으로 나가야 한다. 성역이 없는 매서운 신문으로 부각돼야 한다. 도민일보 생각에 정신이 없다. (1993년 5월 3일)” 김진형 formatio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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