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그래도 사랑은 기억하세요

김선오 시인·시집'나이트 사커' 2022. 11. 24.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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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한상엽

나는 기억력이 매우 나쁜 편이다. 조금만 신경을 쓰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만다. 한번은 친구가 갖고 있는 지갑이 예뻐 칭찬했더니 재작년 내가 생일 선물로 준 것이었다. 한두 번 본 사람의 이름, 직업, 얼굴 등은 물론이고, 적어두지 않거나 신경 써 회상하지 못한 많은 것을 나는 순식간에 잊어버리고 만다.

어린 시절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마 글 쓰는 직업을 갖게 된 이후 관념적 작업에 몰두한 탓이 큰 것 같다. 현실적인 정보까지 저장하기에 뇌가 많이 벅찼던 것이다. 물론 나의 아담한 뇌 용량이 나쁘지만은 않다. 안 좋은 기억이나 상처 받았던 순간 역시 쉽게 망각하기 때문이다. 혹시 누군가 내 앞에서 어떤 실수를 한다고 해도 개의치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어차피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니체는 ‘망각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라고 했다던데, 사실 그렇지만은 않다. 나쁜 기억만을 선별적으로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간직하고 싶은 것 역시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일기를 쓰고 사진을 찍으며 기억하기 위해 노력해도 많은 것이 지워진다.

한때는 이렇게 잊어버리는 것이 너무 아쉽고 슬펐다. 내가 겪은 것들이 나를 이루지 못하고 사라져버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망각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기억이 많은 것을 결정한다고 생각하지만, 상대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려도 다시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는 내용은 삶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한 사람과 이별하는 순간에 그 사람과 함께했던 추억을 떠올리듯이, 이 세계와 이별하는 순간에는 세계와 함께했던 추억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 영원히 눈을 감는 순간을 상상해 보면 미움과 두려움, 불안 같은 것이 얼마나 허망한지 알 것만 같다. 이 작은 뇌로 마지막까지 기억하는 것들이 부디 사랑과 기쁨의 순간이길 바라며, 오늘도 나와 타인에게 조금 더 친절하게 굴자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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