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튀르키예 중앙은행에 50억달러 예치 논의
사우디아라비아가 외환위기를 겪는 튀르키예에 백기사가 될 전망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23일(이하 현지시간) 양국 정부 소식통들을 인용해 사우디가 튀르키예 중앙은행(TCMB)에 50억달러(약 6조7600억원)를 예치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보도했다.
사우디는 외환 예치로 같은 이슬람권인 튀르키예의 외환보유액 고갈을 완화하고, 4년전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 이후 껄끄러워진 관계도 개선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튀르키예는 인플레이션(물가상승) 속에서도 중앙은행이 금리를 내리는 비정통적인 경제정책을 들고 나와 심각한 외환 유출과 통화가치 폭락을 경험하고 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슬람 교리에 근거해 "이자는 모든 죄악의 근원"이라는 개념을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사우디는 튀르키예와 관계 개선을 위해 대규모 달러 지원카드를 들고 나온 것으로 보인다.
튀르키예와 사우디는 2018년 10월 2일 이스탄불 대사관에서 정보부 요원들이 카슈끄지를 암살한 것이 거의 확실시되면서 관계가 소원해졌다. 미국 정보기관들은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카슈끄지 암살을 지시했다고 결론 내린 바 있다.
사우디가 막대한 현금을 튀르키예에 예치해 외환보유액 고갈 숨통을 터주는 협상에 나선 것은 에르도안 대통령의 수개월에 걸친 관계 개선 노력의 결실이기도 하다.
내년 재선을 앞두고 있는 에르도안은 외환위기와 경제위기를 극복하는데 도움을 줄 주요 외부 파트너로 유가 폭등에 힘입어 호주머니가 두둑해진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를 택했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튀르키예는 올들어 3~9월 리라화 방어에 최소 179억달러를 쏟아부었다.
미국을 비롯한 각국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대대적인 금리인상에 나서는 와중에도 TCMB가 에르도안의 압박 속에 금리를 내리면서 대규모 자본이 튀르키예를 빠져나간데 따른 것이다.
튀르키예는 최근 수년에 걸쳐 카타르,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등 아랍 이슬람 국가들 뿐만 아니라 중국 등과도 통화스와프 협정을 맺었다.
'형제국'이라고 부르는 한국과도 통화스와프 협약을 체결한 상태다.
애널리스트들은 러시아에서도 돈이 들어오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러시아 국영 원자력 기구가 올들어 튀르키예에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면서 튀르키예에 50억~100억달러 자금을 이체해 튀르키예 외환보유액을 끌어올린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FT에 따르면 외환보유액 근사치 가운데 하나인 튀르키예의 순외국자산은 21일 현재 115억달러에 불과하다. 최근 고점인 지난 16일 141억달러에서 1주일도 채 안 돼 30억달러 가까이 줄었다.
이 마저도 실제보다 부풀려져 보이는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골드만은 16일 외환보유액 데이터를 토대로 외환보유액이 튀르키예 민간 은행들로부터 단기 차입 476억달러, 다른 중앙은행들에서 236억달러를 차입한 덕에 실제보다 더 많은 것처럼 보인다고 평가했다.
에르도안은 카슈끄지가 실종된 뒤 사우디 정부 '최고위층'이 그의 살해를 지시했다고 주장했고, 튀르키예 관리들은 사우디 대사관에서 그가 암살당했다는 정보를 언론에 흘려 빈 살만 왕세자를 압박했다.
이스탄불의 사우디 대사관에서 사우디 최고위층의 지시로 암살이 이뤄진 점에 격한 반응을 보이며 양국 관계가 최고조의 긴장으로 치달았다.
특히 이 두 나라는 중동과 아랍 이슬람권에서 패권을 다투는 나라들이어서 경쟁 심리도 높다.
그러나 튀르키예의 오랜 경제난이 에르도안을 관계개선의 길로 내몰았다.
에르도안은 또 이스라엘, 이집트, UAE 등과도 공격적인 외교정책으로 마찰을 빚으면서 역내 협력자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에르도안은 올해 사우디에 화해의 몸 짓을 보냈다.
튀르키예 법원은 지난 4월 카슈끄지 살해와 관련된 사우디인 26명의 불출석 재판을 중단했다. 에르도안은 재판 중단 뒤 곧바로 사우디 방문에 나섰고, 빈 살만을 초대했다.
사우디도 카슈끄지 살해 뒤 내렸던 비공식적인 튀르키예 수출 금지 조처를 완화했다.
에르도안과 빈 살만은 20일 카타르에서 열린 2022 월드컵 개막경기에 나란히 참석했다.
한편 물가상승률이 85%에 이르는 와중에도 저금리를 고수하는 비정통 경제정책을 밀어붙이면서 서방 투자자들이 자금을 빼는 가운데 에르도안은 반 년 앞으로 다가온 재선에 빨간 불이 켜졌다.
선거가 불과 반 년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여당 지지율이 생활비 폭등 여파로 사상 최저 수준으로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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